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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으면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나라를 팔아 먹은 매국노 시리즈 1 - 매국노의 대명사 을사오적 '이완용'

by yesssi1990 2023.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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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매국노는 누구일까요?

길거리에 지나가는 한국인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99% 확률도 나올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매국노의 대명사 '이완용'입니다.

 

현재에도 매국노(친일파)에 대한 기사가 나오면, 대부분 댓글에는 이렇게 달릴 것입니다.

 

'o완용' 바로 매국노 짓을 한 사람의 성에 이완용의 이름을 붙여서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이완용은 매국노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의 포스팅은 대표적인 매국노의 대명사 을사오적 이완용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목차>
1. 이완용 그는 누구인가
2. 본격적으로 매국 활동을 시작
3. 고종폐위
4. 을사오적에서 정미 7적까지
5. 이재명 의사의 암살시도
6. 나라를 팔아먹은 최초의 한국인
7. 폐렴으로 죽다
8. 이완용 사후 평가
 
 

 

1. 매국노 '이완용' 그는 누구인가.

이완용은 우봉이씨 참판공파 집안에서 태어납니다.

그는 몰락 양반이었지만 10세의 나이에 33촌 지간인 감찰공파 후손인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권력의 핵심부에 들어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됩니다.

 

사실 이완용의 집안은 고려시대의 잠성부원군 이공정의 후손으로 많은 관직을 배출한 명문가 중에 명문가였습니다.

 

그러나 이완용의 생가 직계 가문은 9대조 이래로 이렇다 할 벼슬살이를 한 사람이 없어서 우봉 이 씨 가문 중에서도 가세가 가장 빈한한 편에 속했습니다.

 

그의 부친인 이호석은 겨우 선비의 체면을 유지하며 어렵게 살아왔다고 합니다.

 

반면 이완용의 양부인 이호준은 당대 정계 거물로, 승정원 동부승지 등의 고위직을 지냈으며 신정왕후 조 씨의 조카인 조성하를 사위로 들였으며 흥선대원군의 서녀와 자신의 서자를 혼인시켰을 정도로 인맥이 튼튼한 사람이었습니다. 

 

 


 

 

증광문과에 급제 후, 세자를 가르치면서 
순종과 사제의 연을 맺다.

 
 

이후에 고종이 국제 업무를 담당할 신진 관료를 교육하기 위해서 '육영공원'을 설립하게 됩니다.이완용은 거기서 헐버트를 만나게 되었고 이때 영어를 배우게 되며, 뛰어난 영어 실력을 갖게 됩니다.

 

그는 미국은 조선과 거리가 멀어서 침입할 우려가 적고, 부국이니 조선이 덕을 볼 것이며, 종교 지상주의 국가이니 야심이 적을 것이라고 판단하며 1887년 미국 주재 공사 참찬관으로 나가게 됩니다.

 

당시에 청나라가 극심하게 반대를 하였으나, 조선의 발전을 위한 고종의 결단이었습니다. 이완용은 미국에서 2년 5개월간 주미 외교관으로 근무하여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 관계의 현실과 근대화된 서구 열강의 모습을 보면서 '친미파' 관료로 성장하게 됩니다.

 

매국노 이완용과 가족들
1889년 5월6일 조지 워싱턴 생가를 방문한 이완용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일본의 눈을 피해 고종을 미국공사관으로 피신시키려고 시도합니다.이 사건을 '춘생문 사건'이라고 하는데 1895년 11월에 있었던 고종의 경복궁 탈출 미수 사건입니다.

 

이범진이 주도하고 이완용, 윤치호, 이윤용, 민상호 등이 참여하였으나 당시 훈련대 대대장 이범래, 이진호가

일본에 밀고해서 실패하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참여했던 사람들은 고종의 높은 평가와 신뢰를 받게 됩니다.

 

이후에 동일한 방법으로 '아관파천'으로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으로 대피시키게 됩니다. 그 공로로 외부대신 겸 농상공부 대신의 벼슬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러시아는 아관파천의 대가로 고종에게 많은 대가를 요구하였으나, 이완용은 이를 모두 거부하며 미국의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미국도 러시와의 충돌을 원치 않으며 거절합니다.

 

매국노의 대명사 이완용은 아이러니하게도 '독립협회'의 위원장, 초대 부회장과 2대 회장을 지냈습니다.

독립협회가 존속 기간의 2/3 이상을 이끌었으며, 회비도 가장 많이 냈다고 합니다.

 

독립문의 현판도 이완용이 썼으며, '독립신문'에서도 이완용을 칭송했습니다. 독립문 정초식 행사 때 한 이완용의 연설이 '독립신문'에 남아 있습니다. 

 


 

 

독립을 하면 나라가 미국과 같이 세계에 부강한 나라가 될 터이요. 
만일 조선 인민이 합심을 못 하여 서로 싸우고 서로 해 하려고 할 지경이면
구라파(유럽)에 있는 펼낸(폴란드)이란 나라 모양으로 찢겨 남의 종이 될 터이라
세계 사기에 두 본 보기가 있으니 조선 사람은 둘 중에 하나를 뽑아 미국 같이 
독립이 되어 세계에 제일 부강한 나라가 되든지 펼낸 같이 망하든지 좌우 간에 
사람 하기에 있는지라 조선 사람들은 미국 같이 되기를 바라노라.

-독립신문 1896년 11월 24일 기사 

초기 독립협회는 청나라의 간섭으로부터 조선을 독립시키기 위해 왕의 지위를 중국과 동일한 황제로 추대하는 등 왕권에 대해 우호적인 성향을 보여왔지만, 러시아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지자 독립협회 수장으로서 이완용의 입지가 난처해지게 됩니다.

 

고종이 끌어들인 러시아제국에 대해서 수구파들은 친러 서향을 보였고 개화파와 독립협회는 반러 성향을 내보이며 갈등을 빚었으며 독립협회가 입헌군주제를 지향하는데 반해 고종과 수구파는 전제군주제를 지향하는 점에서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이완용은 서구 열강에 친숙하고 반러, 민원 행보를 보이는 독립협회의 수장이었던 만큼 독립협회에 부정적인 친러 성향의 주류 근왕파 대신들에게 밀려 1893년 3월 11일 전라북도 관찰사로 발령받고 좌천됩니다.

 

관찰사로 부임한 지 닷새만에 직무 태만으로 감봉, 공금 회령으로 파직 위기를 겪었으며 급기야 독립협회에서도 제명됩니다.

 

이완용은 전북 관찰사 재직 이후인 1900년 7월부터 1904년 이전까지 고향에서 아무 관직 없이 은둔하게 되는데,중간에 고종으로부터 중앙정계로 복귀 권유가 있었지만 이완용이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이완용은 이때까지만 해도 반일을 외치던 인물이었습니다.


 
 

2. 1904년, 본격적으로 매국노(친일) 짓을 시작하다. 을사늑약 체결에 앞장선 을사오적의 수장

1904년 11월 궁내부 특진관 복귀 이후 본격적으로 매국노로서 활약하게 됩니다.

 

경술국치 이전까지의 이완용의 행보는 을사늑약 체결, 헤이그 밀사에 따른 고종 황제 퇴위, 군대 해산, 정미 칠 조약 등으로 대표됩니다.

 

이 시기부터 매국노(친일파)의 대명사라고 불리게 되는 이완용이 매국(친일) 행적이 시작되어 완성하게 됩니다.

 

1905년, 이완용은 학부대신으로서 일본군 무력시위를 등에 업고 어전회의를 열어 서당시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고종을 대신해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을사오적의 수뇌로 불리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친일을 해서 이토 히로부미의 관심을 받습니다.

이완용
매국노 이완용

 

이완용은 고종을 직접 협박한 것은 아닙니다.

당시 고종을 협박, 농락한 것은 궁내부 대신 이재극입니다.

 

이완용은 "안 된다고는 할 수 없으니 첨삭정도로 협상하자"라는 현실 논리를 말하는 식이었습니다. 다만 해당 시점에서 이미 을사늑약의 거부는 불가능했습니다. 

 

만약에 고종과 모든 대신들이 완강하게 거부했다면 고종 목에 총칼을 들이밀고 내각을 환국시켜서라도 일본은 을사늑약을 체결했을 상황이었습니다.

 

을사늑약의 과정을 설명한 이완용의 글을 보면 본인들은 오적이 아니며 나라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총대를 멘 충신이며, 남들이 위선 떠는 것이란 자기 식의 변명을 했습니다.

 

 

3.  고종폐위에 앞장서다. 

1907년 6월 고종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합니다.이로 인해서 총리대신 이완용과 내각대신들은 고종에 몰려가서 물러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완용은 송병준과 함께 이토가 사 주 한대로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고 양위할 것을 강요하고내각 회의에서 황제 퇴위를 결정합니다.

 

전화를 끊고 수라를 거부하는 고종을 협박해서 대리청정의 답을 얻어낸 뒤에 고종도 순종도 없는 자리에서 강제로 즉위식을 진행시켰습니다.

 

사실 그전부터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오적의 일원인 박제순에게 고종 퇴위를 제안했으나,의외로 박제순이 동조하지 않자 그를 물러나게 하고 이완용으로 참정대신으로 앉힌 것입니다.


 

4. 정미 7 조약에 앞장서다. 

이완용은 순종 즉위 직후, 24일 정미 7 조약(한일 신협약)으로 인하여'내정까지 통감부의 지배를 받는다'라는 안을 토씨 하나 수정하지 않고 통과시킵니다.

 

황실 보호는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이완용은 을사오적에 이어서 정미 7적에 이름을 올립니다.

 

그 해 8월 1일에는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켰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해산된 한국군이 합류한 정미의병이 한창 일어났을 때 이완용은 일본군 대장 하세가와를 매일 찾아가 의병토벌에 대해 논의했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서 '조선인 헌병보조원 제도'를 계획하는 데 크게 일조했으며,의병장 허위가 체포되었을 때, 허위를 처벌할 것을 순종한테 상소를 올린 것도 이완용이었습니다.결국에 의병장 허위는 서대문 형무소에 순국하게 되었습니다.

 

순종 재위기간에 이완용은 총리대신을 하면서 형 이윤용을 궁내부 대신으로, 사돈 임선준은 탁지부대신으로, 승녕부 총관(고종의 비서실장)은 처남 조민희, 아들 이항구는 승녕부 시종을 시키는 등 본인의 인척으로 내각을 만들었습니다.

 

 

5. 이재명 의사의 이완용 암살 시도

이완용의 매국 행적으로 인하여 그의 집은 민중들이 불태워버립니다. 본인 또한 12월 22일 명동성당 앞에서 벨기에의 폭군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에 참석했다가 당시 현역 군인이었던 이재명 의사에 의해서 습격을 받았습니다.

 

아쉽게도 암살은 실패했는데, 앞에 있던 인력거꾼 박원문이 이완용의 앞을 막아섰기 때문입니다. 박원문은 이완용 대신에 그 자리에서 사망합니다.

독립운동가 이재명의사
독립운동가 이재명 의사

 

이재명 의사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서 그 자리에서 재차 이완용을 공격했지만 치명상을 입히지 못하고 체포됩니다. 이재명 의사의 공격으로 중상을 입었던 이완용은 이때 입은 상처로 말년에 죽을 때까지 폐렴을 앓았다고 합니다.

 

이재명 의사는 경술국치 이후 박원문을 살해한 죄로 1910년 9월 순국하게 됩니다.

 

여담이지만 당시 이뤄졌던 외과 수술에 대한 기록은 몇 남아 있지 않은 의학사 자료로 인정됩니다. 동 시기의 다른 외과 수술 기록이 전부 파기된 데 비해 재판의 증거로 사용되었기에 남았다고 합니다. 

 

이 수술은 대한민국 최초의 흉부외과 수술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 의대의 흉부외과 총론 시간 첫 수업에서 이 이야기를 소개하며 "의업에 충실한 것이 민족과 역사에 죄를 짓게도 한다."라며 농담을 했다고 합니다.

 

6. 나라를 팔아먹은 희대의 장사꾼 이완용 

아쉽게도 살아나버린 이완용은 요양을 마치고 상경하게 됩니다.

 

상경한 이완용은 8월 4일부로 비서 이인직을 통해 합병을 제안합니다. 아마도 송병준의 일진회 등에게 선수를 뺏기기 싫었던 모양입니다. 

 

통감부마저도 "그물도 안 쳤는데 물고기가 뛰어들었다."라는 반응을 합니다. 합병 조약문에서 이완용은 "국호 한국과 황실의 왕 칭호만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라면서 추가를 요구했는데, 황실 보홀기 보다 황실의 지지를 통한 자기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일본 입장에서 한국 황실의 고분고분한 것은 본인들에게 나쁘지 않기 때문에 받아들이고, 한국 황실을 일본 황실로 편입합니다.

 

합병을 주저하는 이들은 당시 통감이었던 테라우치에게 일러바쳐서 압력을 행사하고, 반대하는 학부대신 이용직을 일본 수해 위문 사절단으로 동경에 보내는 등(물론, 이용직은 이완용의 의중을 파악하고 가지 않았다.)갖은 수단을 써서 순종의 윤허를 받았습니다.

 

고종에게는 "신이 하지 않아도 송병준과 일진회가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는데, 이완용이 물러난 후 고종은 "신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매국 거사는 하지 않겠다."라고 한자는 바로 이완용 아니던가! 그가 무슨 낯으로 짐을 본단 말인가!"라고 통곡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8월 22일, 이완용은 이용직에게는 통보도 하지 않고 최후의 내각 회를 열고는 '합일합병조약'을 통과시켰습니다. 이후 1주일 동안은 숨겼다가 8월 29일 자로 순종의 이름으로 국민들에게 발표합니다.

 

이때 나이 52세, 그는 한국 역사상 최초로 스스로 나라를 팔아먹었습니다.

 


 

7. 이완용 폐렴으로 죽다. 

이완용은 국권 피탈 이후, 일본으로부터 훈 1등 백작 작위를 받습니다.

 

그 뒤로도 사망할 때까지 조선인들을 일제가 노예화하여 착취하는 작업에 아이디어를 제시하거나 기존에 있던 조선인 착취를 위한 나쁜 제도를 더 확대하도록 자문하는 등 착취와 핍박의 행위로 본인의 이득을 얻는 쓰레기 같은 삶을 계속하였습니다. 

을사오적 이완용
노년의 매국노 이완용

 

예를 들어 조선인이 조선인을 감시하는 "조선인 헌병제"도 정미의병 때부터 있던 헌병보조원 제도를 전국적으로 확대시키는 등 1910년부터 1919년 사이의 헌병 경찰 제도는 사실상 이완용이 만들었습니다.

 

또한 이완용은 명목상 총독 자문 기관인 중추원의 고문과 부의장을 지냈습니다.

 

1920년에는 후작으로 승급하였고, 1921년에는 창덕궁을 일본 황실의 별궁으로 만들자고 본인 스스로 2번이나 건의했다가 무산되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에는 조용히 살다가, 1925년 12월 16일에는 자던 도중 식객 노릇하던 조카를 푸대접한 것 때문에 조카한테 침실에서 습격당해 폭행을 당했다고 합니다.

 

1926년 2월 11일, 만 67세의 나이에 폐렴에 걸려서 생전에 받아야 할 합당한 벌을 단 하나도 받지 않고 편하게 죽습니다.


 

8.  매국노 이완용에 대한 평가 

이완용은 객관적으로 보면 관료로서의 능력은 출중했습니다. 능력을 매국에 악용해서 사람으로서는 돌이킬 수 없는 악행을 저지르면 후대에 어떤 평가를 받는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완용은 개인의 능력은 뛰어났지만, 자신의 명석한 두뇌를 매국 행위와 같은 개인의 이득을 위해서 같은 동포인 조선인에게 크나큰 피해를 가하는 일에 사용했으니 죽어서도 두고두고 비판을 받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현대에서도 대하민국 국민들은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을사오적 중 나머지 넷은 잘 몰라도 이완용만큼은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누군가를 이완용에 비유하는 것은 서양 국가에서 나치, 아돌프 히틀러에 비유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치욕스러운 모욕으로 통합니다. 

 

이완용과 동 시기에 똑같이 매국노 짓을 한 송병준이나 을사오적의 경우에도 후대에 이렇게까지 욕을 먹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생전에 이완용이 얼마나 대표적이고 악랄한 매국 노였는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이완용의 후손들도 국가를 상대로 매국행위로 취득해서 국가로 환수된 재산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하고, 승소까지 한 다음에 외국으로 도망가는 것을 보면 이완용 집안의 DNA는 매국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게 확실한 것 같습니다. 

 

지옥이 있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는 없으나,나라를 팔아먹고 같은 동포들을 사지에 내몰고 악랄하게 착취하다가편하게 살다 죽은 이완용이 지옥으로 떨어져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받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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