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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으면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나라를 빼앗긴 그날 - 불법적인 주권 침탈로 이루어진 '을사조약'

by yesssi1990 2023.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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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한일 협약, 을사늑약, 1905년 한일 협약, 또는 을사조약은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제국 사이에 체결된 불평등조약입니다. 나라가 일본에 빼앗긴 그날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목차>

1. 을사조약이란

2. 불법적인 주권 침탈의 과정 

3. 나라의 주권을 완전히 빼앗기다.

4. 강렬한 반발

 

1.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을사조약이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 제국에 양도하고, 대한제국 내 통감부 설치 등이 주된 내용입니다.

이 늑약의 체결로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에 외교권을 양도하고 일본 제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여 사실상 반식민지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일본도 대한제국의 최소한의 주권만 남겨둔 채 식민지화해서 본인들의 이익을 취하고자 한 것입니다. 

 

정식적인 명칭은 제2차 한일 협약입니다.

제1차 한일협약은 1904년 8월에 체결된 협약이고 같은 해 2월에 체결된 한일의정서와는 다른 조약입니다.

 

조약이라 하면은 양국이 대등한 위치에서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체결한 것을 말하지만,

제2차 한일협약의 경우 비합법적이고 강압적인 상태에서 맺어졌으므로 늑약이란 말을 사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습니다.

 

그러나 교과서, 서적, 언론에서는 '을사조약'이라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이라고 하면 모두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토 히로부미입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의 의거 목표로 지정된 것은 초대 통감이라는 상징성 등에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을사조약은 근본적으로는 절차와 황제의 전권 대행이 없는 국제법 위반 협약이었기에 통상적으로는 불법으로 간주 됩니다.

실제로 고종은 이 조약이 무효임을 주장하기 위해서 헤이그 특사를 파견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하게 됩니다. 

 

2. 불법적인 주권 침탈,  을사조약 체결이 되어가는  과정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은 9일 인천에 상륙하고 다음날 서울을 점령하게 됩니다.

당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는 사전에 오오베와 초오미라는 장사꾼을 통해서

외부대신 이지용(을사오적 중 한 명)에게는 1만 엔을 주어 매수하게 됩니다.

1만 엔에 나라를 팔아먹는데 앞장을 선 것입니다. 군부 대신 이근택(을사오적 중 한 명)을 협박하여 일본에 협조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일본군은 탁지부 대신 겸 내장원경 이용익을 납치하여 유람을 시킨다며 일본으로 압송하고

육군 참장 이학균, 육군 참령 현상건, 진위대 4연대장 길영수를 서울에서 추방하고 감시하였습니다.

을사조약을 체결하기 위해서 고종 주변을 모두 잘라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2월 23일 하야시는 일본군을 이끈 이오우에와 같이 경운궁에 들어와

매수했던 이지용과 일본군의 한반도 내 주둔과 사용을 허가하는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게 됩니다.

 

1904년 8월 22일에는 외부대신 서리 윤치호와 1차 한일협약을 체결해

재정고문인 메가타 다노타로와 외교고문 더럼 스티븐스를 두어 노골적으로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합니다.

일본은 만주에서 계속되던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자 대한제국의 주권을 완전히 빼앗기 위해서

열강으로부터의 동의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1905년 7월 27일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허용하는 대신 일본이 대한제국을 지배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1905년 8월 12일 제2차 영일동맹을 통해 인도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1902년 1차 영일동맹에서 약속하였던 대한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항을 없애 일본이 대한제국을 지배할 것을 동의 받게 됩니다.

 

당사자는 빼놓은 상태로 열강끼리 땅나누기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국력이 약할 경우에는 어떠한 취급을 받게 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1905년 9월 5일 러일전쟁을 끝내면서 맺은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대한제국 지배의 걸림돌이었던 러시아를 한반도에서 완전히 배제시키게 됩니다. 결국 1894년 청일전쟁으로부터 이어진 일본의 한반도 침략 프로젝트는 마무리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3.  나라의 주권을 일제에게 완전히 빼앗기다.

일본은 1905년 11월 추밀원장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고종 위문 특파 대사 자격으로 파견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일본이 행사하는 내용의 조약 체결에 나서게 됩니다.

 

11월 9일 서울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는 다음날인 10일 고종을 알현하게 되는데,

일본에서 보낸 '동양평화를 위해서 일본대사의 지휘를 받으라'는 천황의 친서를 전달하지만 고종은 당연히 거절하게 됩니다.

주권을 박탈하겠다는 친서 아닌 친서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5일 후인 15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다시 고종을 알현해서 협약한을 보여주며 조약 체결을 강요하지만 고종은 거부합니다.

 

고종이 계속 거부하자 이토는 자신이 머물던 손탁호텔이라는 곳에 내각 대신들을 불러들여 조약 체결을 하도록 회유를 하지만

대신들은 거부하고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자 다음날은 17일 아침 서울에 주둔하던 일본군 기병 800명, 포병 5,000명 보병 20,000명을 동원해서

경운궁 주변으로 배치하여 강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며 고종 측을 압박합니다.

 

그리고 오전 11시에 주한일본공사관으로 대신들을 불러들여 조약체결을 강요합니다.

이토는 3시간에 걸쳐서 협박과 회유를 진행했으나 대신들이 모두 거절하자 오후 2시에 일본헌병의 감시를 붙여서

경운궁에서 다시 재소집을 시켜 회의를 하도록 합니다.

 

오후 3시경에는 경운궁에서 열린 어전회의 중 이토가 다시 고종에게 결심을 받아내기 위해 알현을 청하나

고종은 인후염이 있다고 하며 거절하고 자리를 피하게 됩니다.

이어진 각료회의에서 일본공사 하야시가 대신들을 협박했으나 찬성하는 이는 한 명도 없었고 조약 관련한 것은 부결되고

일본 측 요구를 거절한다고 하였습니다. 

 

계속되는 거절에 이토는 경운궁 내부에도 일본군을 진입시켜 건물 구석구석에 배치시키게됩니다.

한편 각료회의를 연기라 하라는 고종의 어명을 받고 이토에게 전달하러 가던 궁내부 대신 이재극을 잡아 가두어 회의연기를 무마시키게 됩니다. 또한 외부에 대기 중이던 일본군은 포를 경운궁으로 조준시키면서 무력적인 행동을 하며 협박을 하게 됩니다.

 

오후 9시가 되자 이토는 주한일군사령관 하세가와를 대동하고 일본군을 회의장 안까지 진입시킨 뒤 자신이 각료회의를 주재합니다.

그리고 고종이 각료회의의 결정을 따르겠다는 말을 했다며 대신들을 회유한 뒤 결정은 다수결로 하자고 하며

각료 개개인의 의견을 물어보기 시작합니다. 

을사오적
을사조약 체결 후 기념사진

 

당시 참정 대신 한규설, 탁지부 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은 끝까지 반대합니다.

그러나 일본측의 강압이 계속되는 가운데 학부대신 이완용(을사오적 중 한 명)이 처음으로 찬성의 뜻을 말합니다.

'일본의 요구는 대세상 부득이한 것이다. 국력이 약한 우리가 일본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더이상 감정이 충돌하기 전에 원만히 타협하는 한편 한국의 지위를 보전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라고 찬성하자 내부대신 이지용과 군부대신 이근택도 여기에 동조하게 됩니다.

이완용이 한 말은 지금의 누군가를 떠올리게 합니다.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는 어느 시기에나 나오는 법입니다.

 

오후 11시경 이러한 나라를 팔아먹는 사태를 더이상 참지 못한 한규설은 회의장을 뛰쳐나가 고종에게 보고하려 했으나

일본군에 의해서 감금됩니다.

 

3시간이 지나도 한규설이 돌아오지 않자 각료들은 한규설이 일본군에 의해서 죽은 줄로만 알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됩니다.

결국에는 날을 넘겨 18일이 되고 그동안 반대하는 척하던 농상공부 대신 권중현은 조약문 수정을 전제로 찬성하고

외부대신 박제순은 황제의 명령이라면 어쩔 수 없다는 듯 책임회피성의 애매한 발언을 하면서 찬성해서 5명의 과반수 찬성을 하게 됩니다.

조약 날인은 18일 새벽 1시에서 2시 사이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여기에 찬성한 5명은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하면 모를 수 없는 을사오적으로 불리게 됩니다. 

 

을사오적
출처 - 을사조약 나무위키

 

1905년 을사늑약에 찬성하여 서명한 다섯 대신. 박제순(朴齊純, 외부대신), 이지용(李址鎔, 내부대신), 이근택(李根澤, 군부대신), 이완용(李完用, 학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농상부대신)을 일컫는다.

수정된 조약문은 '조약의 기간은 한국의 부강함을 인정할 수 있을 때까지라는 전문과 통감은 한국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 황실의 존엄함을 인정'한다는 내용이 추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국새와 외부대신의 도장이 있어야 할 조약 날인에 국새는 찾을 수 없어 찍히지 않고 외부대신 박제순(을사오적)의 도장만 찍혀서 체결됩니다. 본인들의 이익만을 생각한 매국노들의 의해서 나라가 일본에 주권을 빼앗기게 됩니다. 

 

4.  대한제국 내 반발 , 그리고 멸망의 길로 들어서다. 

을사조약이 체결 된 후 대한제국 내 반발이 격렬해집니다.

제일 먼저 유림들이 격노하여 격렬하게 맞서게 됩니다. 을사오적의 처벌을 강하게 주장했으며,

고위 관료들과 그 외에도 나라를 위하는 유생들이 뒤를 이었으나 그 수가 너무 많은 관계로 이곳에서 알려드리기 어렵습니다.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고 싶다고 하시면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의 고종 실록 1905년 11월 17일부터 참고하시면 됩니다. 

 

최익현(독립운동가)은 즉각 상소를 올려서 을사조약을 규탄하고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을 모조리 죽일 것을 청했으며

고종이 조약에 인준한 바 없으니 원천 무효임을 강조하며 을사조약을 백지화할 것을 주장합니다.

그외에 관료들과 많은 유생들이 만국 공법을 거론하며 을사오적을 맹렬하게 비판했으며, 조약의 무효성을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안병찬(독립운동가)의 경우에는 즉각 을사오적의 머리를 모두 베어서 저잣거리에 매달 것을 청했으며

전 세계에 을사조약의 부당성과 허위성을 알리는 성명을 발표할 것을 청합니다.

이에 고종은 "그대의 말이 공분에서 나온 것임을 안다. 그 충정을 이해한다."만 할 뿐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어서 주영 서리 공사(영국공사) 이한응과 민영환이 자결하였으며,

갑신정변으로 처형된 홍영식의 형인 홍만식도 독약을 먹고 목숨을 끊어 항거했습니다.

대신 조병세는 상소를 올리며 조약을 규탄하자 일본 헌병들에게 연행되어 강제로 집으로 끌려가게 되자 역시 아편을 먹어 자결하게 됩니다.

이어 학부지사 이상철, 평샹 진위대 상등병 김봉학, 경영관 송병선이 잇달아 자결했고,

나철, 오기호 등이 암살단을 결성하여 오적 처단에 나서게 됩니다.

기산도(독립운동가)는 이근택의 집에 잠입하여 그를 칼로 난자했으나 이근택은 아쉽게도 간신히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나철(독립운동가)이 지휘하는 암살단이 권중현을 저격했으나 실패하게 됩니다. 


전 참판인 민종식이 일으킨 의병은 홍주성을 점령하고 열흘이나 버티면서 을사조약에 관련해서 격렬히 저항했으며

그 외에 전국에서 을사의병이 일어나면서 항거했습니다.

조약에 분개한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성곡(오늘 목놓아 통곡하노라)라는 글을 발표하였습니다.

한국에서 정규 교육과정을 모두 밟은 사람들이라고 하면 모를 수 없는 내용이죠, 장지연은 그 후 대명률에 따라 태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그런데 나중에 변절하여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주필로서 친일 성향의 글들을 게재하며 매국노의 길을 걷게 됩니다.

장지연은 변절한 이유에 대해서 일부 사람들은 국가가 망해가는데 탄식을 하여도 그런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들은 없고

오히려 처벌만 하니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그런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과 별개로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바쳤기 때문에, 그의 변절과 친일 행동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제2의 의병인 을사의병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후 몇 년간 대한제국은 사실상 전쟁터와 같았습니다.

고종은 양반 의병장들에게 밀지와 군자금을 보냈으며 거병하지 않은 유생들에게도 거병을 촉구하며 사실상 일본에 맞섭니다.

게릴라전 위주의 의병들이 군수를 터는 건 식은 죽 먹기였습니다. 이후 정미 7 조약(1907년)에 의한 고종 퇴위 및 대한제국 군대해산과

"남한 대토벌 작전"이라는 무참한 학살을 거친 뒤. 조선은 일본에 강제로 합병당하게 됩니다.

을사의병
일본 헌병에 잡혀서 처형당한 의병들

 

※남한 대토벌 작전, 일제는 의병들을 축출하기 위해서 1909년 9월부터 10월까지 2개월 동안 '남한 대토벌 작전'을 전개합니다.  2개 연대 규모의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였으며, 헌병과 경찰, 그리고 해상에 4척의 수뢰정까지 동원해서 사실상 학살에 가까운 무자비한 토벌 작전을 자행하게 됩니다. 

 

헤이그특사
헤이그특사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주장하기 위해서 고종은 헤이그 국제 회의장에 3명의 특사(헤이그 특사)를 파견하였으나 일제의 방해 공작과 열강의 무관심에 막혀 실패로 돌아가며, 특사 파견을 빌미로 해서 일제는 이완용을 앞세워 고종을 협박하여 퇴위 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켜서 대한제국을 멸망의 길로 몰아가게 됩니다. 

 

을사조약 이후 한국인에게 저지른 일본의 만행에 관련한 포스팅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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