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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으면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이기붕, 이승만의 오른팔이자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던 정치인 (악녀 박마리아 남편)

by yesssi1990 2024.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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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붕을 좌우 불문하고 
좋아하거나 지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던
정치인

 

 

이기붕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제 2공화국(이승만이 대통령이던 시절) 당시 국회의장을 역임했으며, 이승만 정권의 2인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부통령을 역임했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는 충청북도 청주군 청천면 후평리의 몰락한 양반가 집안에서 남매 중 장남이자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조선 태종의 차남인 효령대군의 17대손이었으나 왕족으로서의 대우는 13대조에 끝이나며 이후에는 몰락한 양반가로 힘들게 살았습니다. 아버지마저 30세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게 되면면서 7세의 어린 나이부터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랐다고 합니다.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에 있는 데이버 대학교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호텔 일, 농장 일, 접시닦이 등을 하면서 어렵게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 박마리아를 만나 1931년 약혼했다가 박마리아가 귀국을 하게 되면서 헤어졌다가 이기붕도 귀국하면서 재회를 하고 결혼까지 하게 됩니다. 이기붕이 아내이자 악녀 박마리아가 궁금한다면 아래의 글을 읽어주세요.

2023.07.12 - [알고 있으면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 이승만의 오른팔 이기붕의 아내, 현대사 희대의 악녀 박마리아

 

 

광복 이후의 삶, 이승만의 비서가 되면서 승승장구하는 삶을 살게 된다. 

 

광복 이후에 하는 일마다 안 되어서 힘들게 살던 이기붕은 이승만이 귀국하자 개인비서가 되면서 승승장구 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그의 아내이자 희대의 악녀 박마리아가 출세와 명예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 이승만 주변에 붙기 위해서 엄청 노력했기 때문이다. 특히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가 당시 여성 정치인 임영신과 불화가 있었던 틈을 탔다. 

 

 

박마리아는 이 틈을 타 프란체스카에게 붙어서 친분을 다져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 지위로나 별 볼 일 없던 이기붕을 정계에 들이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이승만 정권의 2인자로서의 정치 활동..

 

이기붕은 무능력 했지만, 아내 덕분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 경무대비서실장을 거쳐서 서울특별시장까지 지냈습니다. 서울특별시장으로 재직하던 때의 이기붕은 청렴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한강 다리를 끊고 후퇴할 때는 "서울특별시장이 된 책임으로 남겠다."라고 주장했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만약에 그가 남아서 북한군하고 싸우며 끝까지 항전하다가 죽었으면 희대의 간신배가 아닌 노블리스오블리주를 실천한 한국을 빛내는 위인으로 남았을텐데 말이다. 결국에는 그도 한강 다리를 끊고 이승만하고 도망간 사람일 뿐이다.

 

 

이기붕은 후사가 없던 이승만에게 자기 아들인 이강석을 양자로 입적시키며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다졌습니다. 당시 법에는 장자는 다른 집 양자로 들어갈 수 없다고 했는데 이걸 어기고 양자로 입적시켰다고 합니다. 세간에는 아들을 팔아 출세한다고 욕먹었으며, 본인도 장자인 이강석을 양자로 보내기 싫어서 둘째를 권했으나 이승만이 이강석을 원해서 어쩔수 없이 보냈다고 합니다. 

 


 

 

당시 잘 나가던 이기붕에게 큰 시련이 닥쳤습니다. 바로 1956년 정, 부통령 선거에서 이기붕은 이승만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장면에게 밀려서 미끄러지게 됩니다. 낙선한 이유는 당시 국민들이 자유당 정부에 염증을 느낀 것도 컸으나 이기붕이 장면에 비해서 한참 미달인 스펙이었기 때문에 떨어진 것도 있었다. 

 

 

그 시절에 미국까지 유학을 갔으나 박사 학위도 없고 영어도 잘 못했던 스펙이 형편 없던 이기붕은 장면에 비해서 한참 모자랐기 때문입니다.

 

 

여담으로 박마리아는 이기붕이 선거에서 떨어지고 본인이 교수로 재직 중인 학교를 40일이나 결석할 만큼 홧병으로 인해서 일상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참, 박마리아도 공과사를 제대로 구분할 줄 모르는 욕심만 가득한 여자인게 여기서 한번 더 티가 나는 부분입니다.

 

 

 

 

3.15 부정 선거 .. 그리고 이기붕 가족의 사망 

 

이기붕은 1930년 정,부통령 서건에서도 자유당의 부통령 후보에 출마했으나 후계 구도를 명확히 하겠다고 3.15 부정선거를 터뜨리며 분노한 국민들은 4.19 혁명을 일으키게 되면서 국무회의에서 이기붕을 사퇴시키기로 하였습니다. 

 

 

성난 국민들이 서대문의 이기붕 자택으로 몰려온 것을 본 이기붕은 겁에 질린 상태로 경기도 포천시의 대한민국 육군 제6사단 사령부로 가서 도망갔으며 이미 스스로 걷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고 식사도 못해서 미군이 준 주스로 연명했으며 대화도 박마리아가 옆에서 말을 알아듣게 해줘야 겨우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점점 건강이 악화되던 이기붕은 부통령 자리에서 사퇴하겠다고 하였으나 이승만이 격렬하게 반대 하였으나 김정렬 국방장관이 설득하면서 사퇴에 동의하게 되었으나 다음날 신문기사에는 이기붕이 '사퇴 고려' 라는 기사가 실리게 되면서 국민들을 더욱 분노케 하였고 결국에는 이기붕의 방패가 되어주던 이승만 정권의 붕괴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장남 이강석에 의해서 가족들 모두 살해 당했다.

 

4.19 혁명이 일어난지 9일째 되던 1960년 4월 28일 새벽 5시 20분 경무대 비서동 36호실에서 당시 육군 소위였던 장남 이강석에 의해 이기붕을 포함한 가족들은 모조리 권총으로 살해되었고 이강석도 자살하게 된다. 향년 63세 참으로 비참한 최후였는데 공교롭게도 같은날 아침 미국 대사 맥카나기는 이기붕 내외의 망명 신청이 수락되었다는 미국 정부의 뜻을 전달한 상태였다. 

 

 

이강석이 어떤 심정으로 일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별로 알려진 바가 없으며 가족들 전부가 같이 죽기로 합의하고 죽은 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이기붕과 박마리아는 일전에 사는게 힘들다고 자살 기도를 여러 번 했다고 하며 그로 인해 치사량의 수면제를 복용하고 이미 자살한 상태에서 이강석이 권총 두 자루를 준비하여 머리와 가슴에 각각 대고 쏘았다는 것이 현재까지 유력하다. 훗날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강석의 시신에는 머리와 가슴에 총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한 자루의 총만 사용할 경우 실패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인데 이는 사실 종종 있는 일이다. 이강석의 사인이 타살이라는 루머가 퍼진 이유는 뜬금없게도 도조 히데키 때문이다. 이유는 도조 히데키가 가슴에 권총을 겨누고 쐈는데 자살이 실패한 것. 사실 도조 히데키는 콜트 22 같은 소구경 권총을 사용했기 때문에 자살 실패 가능성이 너무나도 높았고, 이 때문에 자살할 의도로 가슴을 쏜 게 아니라 쇼였다는 얘기도 있다. 그런데 소구경 권총 때문에 자살이 실패한 것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고 가슴에 총을 쐈다가 죽지 못한 것이 주목을 받아 "가슴을 쏘면 자살에 실패한다."는 속설이 퍼지고 이에 더해 "이강석이 가슴에 총을 맞았기 때문에 타살"이라는 말이 퍼지면서 타살론이 제기된 것이다.

 

 


 

이기붕과 가족들의 시신은 이후 수습해서 1960년 4월 30일 수도육군병원 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장례식에는 이승만 내외와 허정 등 내각 인사, 여야 국회의원들이 참석했으며 장지는 망우리 공동묘지였다. 1970년대까지는 이기붕의 비서 등 지인들이 망우리에서 추모 활동을 벌인 것이 확인되며, 1976년 경에 경기도 고양시와 파주시의 경계에 있는 명봉산 자락의 한 사설묘지로 이장했다.

 


이기붕의 가문인 효령대군파 종중에서 가끔 제례를 지내지만 묘지 관리비도 내지 않아서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 2008년경부터 미국에서 이기붕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한 여성이 거액의 관리비를 보내서 석축도 새로 만들었지만 이마저도 몇년 후 끊겼다.

 

 

 


 

 

한국 근현대사를 통틀어 좋은 평가를 찾아볼 수가 없는 몇 안되는 인물로, 좌우를 불문하고 좋아하거나 지지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의 정치인생 내내 정치적 동반자였던 이승만 대통령의 경우 전쟁 중 본인들만 무책임하게 도망간 것과 후일의 독재 행각 등으로 맹렬하게 비난받기도 하지만, 인의 장막 때문에 돌아가는 현실을 파악해지 못해서 그랬다는 최소한의 변명거리는 있으며 문교부에 원자력과를 신설하고 1958년에 원자력법을 제정하면서 원자력 발전소를 향한 연구를 시작한 것, 한미 상호방위조약과 평화선 선포, 농지개혁, 학교 설립 등 국가 초기의 기틀을 닦은 족적도 부정할 수 없기에 공과 과가 양립하여 아직까지도 평가가 극명히 갈리는 인물인 것과 대비된다.



하지만, 이기붕은 그러한 공로도 없이 오직 자신의 밥그릇 챙기기에만 급급했다. 오히려 이승만 대통령 지지자 중에선 이승만의 재선이 확실한 상황이라 이기붕이 실책을 저지르지만 않았어도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까지 하지는 않아도 됐을 것이라면서 아쉬워 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물론, 당시 이승만의 나이와 건강상태 등을 고려했을 때 임기를 무사히 마치고 사망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지만 이렇게 되면 적어도 대한민국 대통령 임기 중에 죽는것이니 전국적으로 시위대가 들고 일어나서 강제로 하야해서 비참하게 타국에서 최후를 맞는 것 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다만, 이 사람이 딱 한 가지 잘한게 있는데 바로 국민방위군 사건을 효율적으로 처리한 것이었다. 국민방위군 사건 관련자 김윤근 일당을 제대로 사법처리하지 않았다면 현대판 임오군란이 터졌을 것이고 한국전쟁 중인 대한민국에 크나큰 치명타를 안겨줬을 것이다. 이기붕은 김윤근 일당이 군납비리를 저질러서 국가를 지키려고 한 국민방위군들을 모두 굶겨죽이고 얼어죽게 만든 죄상들을 낱낱이 밝혀내고 죄에 맞는 합당한 처벌인 사형을 선고했고 최초로 공개총살형이라는 초강수를 두어 공산화당할 뻔한 대한민국을 구했다.

 


결국 과오가 너무 많은 이기붕이지만, 최소한 이것만큼은 긍정적으로 평가를 할 수 있겠다. 물론, 이걸로도 덮지 못할만큼 이기붕이 저지른 과오가 너무 큰 데다 3.15 부정선거 등이 워낙 임팩트가 남아서 덮어지지 않는 경우도 제법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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