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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으면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한국 재벌가 역사 - 현대그룹 경영권 다툼, 현대그룹 왕자의 난

by yesssi1990 2023.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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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에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태조 이성계와 오아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두 차례의 난을 가지고 우리는 '왕자의 난'이라고 부릅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현대판 왕자의 난'이 터지게 됩니다. 현대그룹의 경영권 계승을 둘러싸故정주영 회장의 차남 정몽구와 5남 정몽헌이 벌인 싸움을 가리키며 언론에서는 현대그룹의 '왕자의 난'이라는 표현으로 기사가 나기도 했습니다. 한 때 대한민국 재계 1위에 등극한 굴지의 대기업이었지만 이 사건으로 범 현대가는 해체되어서 여러 그룹으로 나뉘게 됩니다. 현재 우리가 아는 '현대'가 붙은 회사들은 분리돼서 각각의 회사로 자리 잡게 됩니다. 

 

현대그룹 '왕자의 난'의 시작되다.

이익치
이익치

2000년 정주영 명예회장의 차남인 정몽구 당시 현대그룹 공동 회장과 5남인 정몽헌 당시 현대그룹 공동 회장이 그룹의 패권을 놓고 다투게 됩니다.  정몽구 회장은 정몽헌 회장이 해외 출장을 간 사이 3월 14일 기습적으로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고려산업개발로 발령시킵니다. 이익치 회장은 정주영 명예회장과 정몽헌 회장의 최측근이었습니다. 당시 정몽구 회장은 현대그룹의 자동차 부문을, 정몽헌 회장은 건설/전자 부문을 가져갈 예정이었습니다. 당시는 현대자동차의 위상은 지금처럼 높지 않았던 반면에 현대건설과 현대전자는 국내 최고 기업들로 정주영 명예회장은 처음부터 경영 능력이 두드러졌던 정몽헌 회장을 특히 아꼈다고 합니다. 이에 자동차만으로는 향후 성장가능성을 확신할 수 없던 정몽구 회장 측은 현대증권으로 대표되는 그룹의 금융 부문을 노리고 동생의 최측근인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배제하려 했던 것입니다.  차남 정몽구가 시작한 전쟁의 서막이었습니다.

 

현대그룹 '왕자의 난' 어떻게 전개 되었나.

2000년 3월 24일 귀국한 정몽헌 회장은 자신과 아버지의 측근인 이익치 현대증권회장, 김윤규 현대건설 사장, 김재수 현대그룹 구조조정본부장 등을 모아 이익치 회장의 인사 발령을 무효화하고 정몽구 회장의 현대그룹 공동회장직을 박탈하게 됩니다. 정몽구 회장은 26일 아버지인 정주영 명예회장을 만나서 회장직 복귀 명령을 받아내지만 몇 시간 뒤 정몽헌 회장과 그의 측근들이 정주영 명예회장을 만나 다시 그 명령을 무효화하게 만듭니다. 당시의 정주영 명예회장은 고령의 나이로 인해서 판단력이 매우 흐려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대그룹 '왕자의 난' 결말

현대그룹 왕자의 난

2000년 3월 27일에 정주영 명예회장이 직접 현대경영자협의회에서 '정몽헌 단독 회장 체제'를 공식 승리한 게 됩니다. 왕자의 난은 정몽헌 회장의 승리로 마무리되고 정몽구 회장은 8월 현대자동차와 기타 자동차 관련 계열사들을 가지고 현대그룹으로부터 계열 분리를 실시해 현대자동차그룹을 만들게 되면서 현대판 '왕자의 난'은 이렇게 끝나게 됩니다.

 

현대그룹 '왕자의 난'  그 이후

당시만 해도 경영권 다툼은 5남 정몽헌 회장의 승리로 끝나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현대그룹의 모기업이자 상징인 현대건설이 2000년 10월 1차 부도를 맞고 휘청거리다 결국 2001년 8월 채권단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현대전자도 외환위기 당시 lg반도체를 무리하게 인수했다가 2000-2001년 반도체시장이 불황을 맞자 빚 10조 원을 지고 결국 채권단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심지어 정몽헌 회장 본인도 아버지의 숙원사업이었던 대북사업과 관련해 4억 5000만 달러(약 5000억 원)를 북한에 은밀히 송금한 사건으로 검찰 수사를 받게 되는 등 여러 악재가 겹치게 됩니다. 2003년 8월 4일 서울 종로구 계동에 위치한 현대그룹 사옥 12층 회장실에서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당시 그의 죽음은 자살이 아닌, 타살이라는 소문도 무성했지만 국립과학수사원과 경찰의 조사의 최종 결론은 자살로 결론이 나게 됩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길을 걷던 범 현대가의 기업들은 2010년에 발생한 현대건설 인수전에서 한 번 더 부딪히게 됩니다. 현대건설은 정주영 회장 생전 당시 범 현대그룹의 모기업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현대그룹과 현대자동차그룹은 과거 범 현대그룹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서로 인수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자금력에서 열세였던 현정은 회장의 현대그룹이 훨씬 높은 입찰가를 제시해 우선 협상 대상자가 됐으나 언론과 정치권에서 자금 조달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등 문제가 생기게 되면서 우선 협상 대상자 지위가 박탈되게 됩니다. 결국 현대건설은 차남 정몽구 회장의 현대자동차그룹에서 인수하게 됩니다. 왕자의 난 이후 현대그룹은 공정거래법상 대규모기업집단의 기준인 자산가치 5조 원에도 들지 못하는 '중견기업'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범 현대가 이후에도 경영권 분쟁에 휘말리다.

현대그룹 왕자의 난

 

현대그룹은 정몽헌 회장의 자살 이후에도 경영권 분쟁에 휘말리게 됩니다. 경영권 분쟁을 처음 제기한 것은 故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동생이자 KCC그룹의 정상영 회장이었다. "정 씨의 현대그룹이 현 씨에게 넘어가게 놔둘 수는 없다."며 범 현대가의 결집을 호소한 정상영 회장은 정몽준의 현대중공업 측과 손잡고 현대그룹의 주요 계열사인 현대상선의 주식을 대거 매입하며 승리하는 듯했으나 다른 범현대가의 폭넓은 지지를 끌어내는 데에 실패했고, 현정은 회장이 그룹 지주사격인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40% 이상 확보하며 현 회장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KCC 정상영 회장과의 분쟁 이후, 정몽준 현대중공업 회장과 경영 분쟁에 또다시 휘말리게 됩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정몽준 측이 현대그룹의 경영권을 가져오지는 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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