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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으면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대한민국 대통령 시리즈 -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by yesssi1990 2023.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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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한 집안에서 태어난 청년,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다.

고종 12년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군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조 이성계의 18대손이자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의 16대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5대조부터 벼슬길이 끊겨서 몰락한 집안이었습니다. 이승만은 아버지 이경선, 어머니 김말란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으나, 손위의 두 형이 이승만이 태어나기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이승만이 장남 역할을 대신하였습니다. 사실상 집안의 6대 독자가 되었습니다.

1877년 서울 남대문 밖 우수현으로 이사 와서 그곳에서 자랐습니다. 이승만의 호인 '우남'이 우수현의 남쪽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승만의 어머니가 태몽으로 꾼 용꿈에서 영감을 받아서 아호는 승룡이었으나, 사주팔자를 보니 '늦게 왕이 될'사주라 하여 승만으로 개명했다고 합니다. 사주팔자대로 이승만은 늙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제1대 대통령이 됩니다.

 

청년시절 이승만

어린 시절에는 서당을 다녔고 그 당시 유생들이 그러했듯 이승만도 과거시험에 여러 번 응시했으나 낙방했다고 합니다. 다만 당시의 시대상황 자체가 부패했기 때문에 이승만 자력으로 합격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과거시험은 갑오개혁으로 인하여 사라지게 됩니다. 동학농민운동이 한참이던 1894년 20살에 개화사상을 받아들여 아펜젤러의 배재학당에 입학해서 공부하게 됩니다. 당시 이승만은 웅변으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서재필 등의 계몽 운동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으며, 본래는 영어를 배우러 입학했으나 이곳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것에 대해서 처음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계몽운동에 참여하게 됩니다. 1898년 3월 10일 종로에서 열린 한국 최초의 근대적 대중집회인 만민공동회에서 23살의 이승만은 연사로 나서 러시아의 이권 요구를 규탄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젊은 리더로 부상하게 됩니다.

이승만 젊은시절

1898년 4월에는 한국 최초의 민간 일간신문인 매일신문을 창간했습니다. 순한글 신문이었으며 외국소식과 개화 문명에 대해서도 실었습니다. 이후 매일신문에서 자금난 때문에 갈등이 생겨서 해임당하게 됩니다. 이후에는 매일신문을 창간한 경험을 바탕으로 제국신문을 창간해서 민중계몽과 항일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역모로 인해 잡혀가 고문을 당하다.

독립협회의 남궁억, 이상재 등이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하려 한다는 익명서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자 이승만은 배재학당 학생들을 이끌고 명주와 평리원에서 밤샘 농성을 벌여서 그들을 석방시켰습니다. 이후 헌의 6조의 실시를 약속한 고종에 의해 남궁억 등과 함께 중추원 의원에 임명되었으나 불과 한 달 만에 고종 퇴위 음모메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1899년 1월 한성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전단지를 돌리다가 체포되었는데 전단지 내용 중 일부가 '광무황제(고종)는 연령이 높으시니 황태자(순종)에게 자리를 내주셔야 한다."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독립협회 시기에 이승만은 박영효 계파와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박영효 내란 음모 사건에도 연결되어서 감옥에 투옥하게 됩니다. 투옥되었을 때 같은 독립협회 동지였던 주시경이 몰래 넣어준 육혈포(권총)로 탈옥했다가 도중에 잡혀 종신형이 내려졌습니다. 감옥에 투옥된 후 이승만의 아버지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이리저리 부탁하고 다녀서 목숨은 건졌으나 감옥에서의 고문까지는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당한 무자비한 고문으로 인해 평생 후유증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승만의 큰 특징 중 하나인 안면근육경련이 감옥에서 당한 고문의 후유증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감옥에서도 학문 및 저술활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선교사들을 통해 성경을 들어와 읽으면서 간수 및 동료 죄수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했습니다. 많은 책들을 읽으며 새로운 사상을 학습했으며 자신만의 능력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감옥 내 도서관을 만들 정도였습니다. 미완성이긴 했지만 한반도 최초의 영한사전을 만들기까지 했습니다. 러일전쟁 이후 영어에 능통하고 국제정세에 밝은 인물을 원했던 민영환과 한규설의 끈질긴 설득으로 29살에 5년 7개월이라는 긴 감옥 생활을 끝으로 특별사면을 받고 석방되었습니다. 이후 대한제국 독립 보전 요청이라는 임무와 함께 미국 유학을 결심한 이승만은 미국으로 떠나게 됩니다.

미국 유학 시절, 학업과 독립운동을 병행하다.

1905년 8월 5일에는 루스벨트를 만나서 대한제국의 독립보전을 위한 교민들의 청원서를 전달했습니다. 루스벨트는 "대한제국 정부의 공식 문서로 절차를 갖춰 제출하면 검토해 보게 쑈다고"며 이승만을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 미국은 일본과 비밀리에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은 시기라 공식적인 절차로 제출하라는 말은 그저 외교적 언어일 뿐 애초에 그런 요청은 받아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돌려 말한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그런 사실을 알 리 없었던 이승만은 당시 미국 대사였던 김윤정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일본에 포섭되었던 매국노였던 그는 이승만의 요청을 외면했습니다. 한 때 이승만이 친일파라는 이야기도 있었으나, 이승만은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 일했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입니다. 독립운동 이외에도 미국에서 공부하며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학사,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정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최초의 한국인 박사학위 취득자입니다. 이러한 이력은 이승만에게 엄청난 자부심을 심어주었으며, 권위주의적인 성격과 정치적 행보에 두루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스티븐스 저격사건, 그리고 장인환, 전명운의 변호를 거부하다.

1908년 3월 스티븐스 저격사건(친일외교관 스티븐스 저격)이 일어나게 됩니다. 스티븐스를 저격한 장인환, 전명운의 법정 통역을 맡아 달라고 이승만에게 요청했습니다. 이승만은 교민들에게 3천 달러의 보수를 요구했습니다. 그 시대 굉장히 큰 액수의 금액이었습니다. 교민들은 모아서 이승만에게 전달했으나 자신은 기독교인으로서 살인자를 변호할 수 없다며 거절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독립운동가들을 외면한 이승만이라며 사람들은 비판했지만, 당시 그의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을 겁니다. 재학 중이던 하버드 대학교는 미국 동부에 있었으나, 재판은 캘리포니아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학업을 중도에 그만두고 서부까지 날아와 재판의 통역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시 미국 내 여론은 일본에 우호적이었습니다. 장인환과 전명운의 입장에서는 미국 친일파를 제거한 의 거였을지 모르지만 미국인들 입장에서는 자국의 외교관이 암살당한 사건이었습니다. 미국 내 여론은 '조선인들은 잔인한 살인광'들이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외교관 암살이라는 사건은 엄청난 외교적 문제가 되는 사건이었으며 스티븐스 저격사건은 미국 내 조선의 입지만 약화시킬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승만은 이런 사건은 여론을 악화시켜 독립에 오히려 해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거절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학생 신분으로서 시간이 부족하다고 거절한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예수교인 신분으로서 '살인재판'을 통역할 수 없다는 말은 이승만의 인성이 좋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 되다.

광복 후 이승만은 10월 16일에 대한민국으로 귀국했습니다. 이승만은 기존에도 한국 내에 독립을 위해서 활동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귀국 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정적인 여운형이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의 지도자로 추대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추대된 것이었기 때문에 이승만은 방송을 통해 공식적으로 거절했습니다. 이후 이승만은 조선공산당 재건파를 이끄는 박헌영을 만나 대화를 나누지만 서로 의견차를 좁히지 못하게 됩니다. 1945년 11월 박헌영을 포함한 조선 공산당 계열이 친일파 청산 문제를 내세우면서, 이승만과 박헌영의 갈등은 심화되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로 인하여 11월 23일에는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했다. 그 뒤 김구는 박헌영 측과 합작을 추진했으나 12월 13일 박헌영이 상해임시정부를 부정하는 선명을 발표하면서 합작은 실패로 끝났다. 12월 29일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시위들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습니다. 김구의 임시정부에서도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결의안을 채택합니다. 이승만도 신탁통치에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몰래 38선을 넘어 북으로 갔던 박헌영이 소련에 설득된 뒤 1946년 1월 3일 좌익세력들은 신탁통치에 찬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김구는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하고 정식 국회 수립 전까진 과도정부를 만들고 이를 위한 결정권은 자신과 이승만에게 일임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가 비상국민회의에 참석했던 인물들을 모아 회의를 개최하고 이들을 미군정 최고자문기관인 '남조선 대한민국 대표민주의원'으로 임명했습니다. 의장에는 이승만, 부의장에는 김구와 김규식이 올랐습니다. 이후 이승만은 사무엘 돌베어라는 미국인에게 100만 달러를 받고 광산고문이라는 직함과 채굴권을 주었다는 스캔들이 터지면서 의장직을 사퇴했습니다.

[중략]

이승만은 제헌 국회에서 초대 국회의장 자격으로 대통령 중심제 헌법 제정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같은 해 7월 20일에는 제헌국회의 간접선거로 진행된 제1대 대통령선거에서 출석의원 196명 중 180명의 표를 얻어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가 1948년 8월 15일에 수립됨과 함께 공식적으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습니다.

반민특위 실패, 친일파 대통령?

이승만 정부의 초대 내각에는 친일파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승만의 초대 내각의 국무총리는 이윤영을 지명했습니다. 이윤영은 이북 출신이고 조만식과 조선민주당을 이끌었었기 때문에 후에 남북통일을 위해서 이북동토들의 힘을 얻기 위해서 지명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제헌국회는 이에 크게 반발했으며 결국 부결되었습니다. 그 후 이범석이 초대 국무총리에 임명됩니다. 이승만은 초대 농림부 장관에는 자신과 반대되는 좌익인사인 조봉암을 임명했습니다. 이유는 지주계급인 한민당을 견제하고 농민들의 시급한 문제인 토지개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북한이 시행한 토지개혁에 남한의 농민들이 불만을 느끼고 사회주의가 퍼지는 것을 우려했습니다. 이에 따라서 1950년 한민당의 반대를 뿌리치고 농지개혁법을 단행하여 광복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던 지주제를 혁파하고 농민들의 불만을 해소하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이는 이후 6.25 전쟁 초반의 패배를 극복할 수 있던 근본적인 이유가 되었습니다. 북한이 전쟁 초기 남한 농민들에게 선전한 토지분배가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949년 초 반민특위가 출범했고 친일 반민족행위자 7,000여 명 중 682건을 조사해 305명을 체포했습니다. 그러나 반민법 반대 관제 데모들이 벌어지고, 6월 6일에는 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하여 위원 35명을 체포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반민특위는 급격히 위축하게 됩니다. 국내 기반이 미약했던 이승만은 친일 전력이 있는 자들을 등용했습니다. 한반도를 반소반공의 전진기지로 활용하려던 반공국가 미국에게도 친일파 청산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승만은 1949년 2월 반민특위 활동이 위헌이라는 담화를 발표하게 됩니다. 이후 반민특위 흔적을 제거를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진행했습니다. 심지어 6.25 전쟁에도 이루어졌습니다. 결국에는 반민특위는 폐지됨으로써 친일파 청산은 단 한 명도 처벌하지 못한 채 끝이 났습니다. 이승만이 '친일파'다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없지만 친일파 청산에 굉장한 미온적 태도를 보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본인의 안위를 위하여 나를 팔아먹고, 동포를 팔아먹은 친일파들을 등용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친일파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친일파에 근접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6.25 전쟁 터지자마자, 한강대교를 폭파시키고 도망간 대통령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침공으로 6.25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전방에 배치된 인민군들은 신속히 남한으로 진격했습니다. 이승만에겐 같은 날 오전 10시나 돼서야 북한의 침공이 보고 되었습니다.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군은 압도적인 전력을 바탕으로 밀어붙이고 있었습니다. 이날 이승만은 주한 미국대사를 만나서 한국은 더 많은 무기와 탄약 그리고 특히 더 많은 소총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이승만과의 회담이 끝난 뒤 미국대사는 미국에 "부산으로 10일 치의 탄약들을 즉시 보내라"라고 전문을 보냈습니다.

이 대목으로 보아서 나머지 이승만이 서울에서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인은 서울을 이미 떠난 상태였지만 국회에 알리지도 않은 상태였으며, 국군이 밀려서 인민군이 서울 근처로 쳐들어왔는데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지원군과 군수물자가 올 것이며 현재 국군이 열심히 싸우고 있다고 연설을 했습니다. 의정부를 탈환했다는 등, 국군이 안전하게 서울을 지키고 있다는 등 거짓말을 했습니다. 국민들은 대통령의 그런 연설로 인해서 피난을 가야 하는지 제대로 파악도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본인은 부산으로 피난 갈 때 한강대교까지 폭파하고 가는 악의적인 행동을 했습니다. 인간으로서 대통령으로서 쓰레기 같은 행동을 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국민들을 기만한 것입니다. 이승만은 참모진들의 여러 차례 피난 권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7일 새벽까지 버티다가 마지막 순간에 피난을 간 것을 보면, 서울을 잃게 되면 자신의 정치적 생명이 크게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대통령이라고 한다면 국민들의 안전을 먼저 생각했어야 했어야 했습니다.

6.25전쟁


그렇게 6.25 전쟁이 발발 한 지 2주년에는 충무로 광장에서 이승만이 연설을 하였는데 김시현이라는 사람의 사주를 받은 유시태라는 의열단 출신의 노인이 이승만을 암살하려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권총은 불발돼 이승만은 죽을 위기를 넘겼습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6.25 전쟁이 장기화되자 부담감을 느낀 미국이 휴전협정을 추하자 이승만은 "휴전협정을 받아들이라는 것은 한국민에 대한 사형집행장이다"라며 한국에 대한 안전보장이 없이는 휴전을 할 수 없다며 극렬히 반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승만과 미국은 갈등이 심화되었고 미국은 필요할 시 이승만을 제거하려는 '에버레디' 계획까지 세웠다고 합니다. 일전에는 1952년 8월 2일 진해 앞바다에서 낚시를 하던 이승만에게 11발의 총을 쓴 사건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전쟁이난 국가에서, 심지어 대통령이라는 인간이 전쟁 중에 낚시를 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는 않습니다. 본인은 여유로웠나 봅니다.


휴전 협정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국가 재건 사업

이승만이 완전히 무능력한 대통령만은 아니었습니다. 미국은 한국을 보호해 줄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휴전 협정을 하게 된다고 하면 언제든지 전쟁이 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승만의 수에 의해서 미국은 휘말리게 되었고, 휴전협정 체결 이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것을 약속하게 됩니다. 휴전 이후 1953년 10월 이승만은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서,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 속에서 현재까지도 지속되는 미국의 한국 안보보장을 얻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이승만은 교육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하여서 초등학교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전후 대대적인 학교 건립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따라서 제한되어 있었던 고등교육을 기회를 개방시켜서 전 국민의 교육 수준을 향상했습니다. 원래는 정부수립 직후부터 실시하려 했으나 전쟁으로 인해 차질이 생겨서 휴전 이후에는 1954년부터 본격적으로 재개하여 1959년에는 전국 7세 아동의 95.3%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초등학교뿐만 아니라 전문직 인재 육성을 위해서 한국외국어대학교, 인하대학교 등 여러 대학교를 세우는 데 투자했습니다. 그 결과 80%에 달했던 문맹률은 22%로 떨어졌으며, 학교 수와 학생 수는 11배 이상으로 크게 늘었습니다.

 

연임 제한을 철폐하는 사사오입 개헌과 3.15 부정선거

이승만은 장기 집권을 위해서 1954년 11월에는 초대 대통령에 한해 연임 제한을 철폐하는 사사오입 개헌을 일으켰습니다. 동시에 이승만은 국영화와 공영화, 정부통제 등 사회주의적 계획경제 요소들을 헌법에서 삭제하여 시장경제를 추진하였습니다. 1956년 대선에서 이승만은 부정선거를 통해 다시 한번 집권했습니다.

3.15부정선거


1960년 3월, 4대 대선에서 이기붕(이승만의 양자)이 출마한 부통령 선거에서 3.15 부정선거가 일어났습니다. 마산에서 시작된 부정선거 항의 시위는 부산, 대구를 거쳐 서울로 확산되었습니다. 시위에는 경찰이 투입되어 무차별 폭행과 연행이 일어났습니다. 마산 시위에 참여한 고등학생 김주열이 경찰의 최루탄을 눈에 맞고 사망했으며, 시신은 유기되었지만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면서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국민을 지켜야 하는 경찰들이 앞장서서 국민들의 목숨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이승만은 자유당 강경파에 의해 정보가 완전히 차단되어 정국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고, 부통령 선거에서 부정선거가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승만은 이후 김주열 사건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관료들은 이승만에게 보고한 국무회의록을 보면 "불순불자들이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것 같다." "야당들이 선동하는 것 같다." "학생들이 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식으로 보고를 했습니다.

사실 이승만은 본인이 하야하는 게 좋겠다고 의견을 전달했으나, 위와 같이 불순불자들이 조종한다, 야당이 선동한다, 공산당이 사주한다 라는 말을 믿었고 시민들을 향해 '야당에 의해 선동당한 국민들의 폭동, 공산당이 사주한 난동이라는 발표를 하게 됩니다. 4월 18일에는 고려대생들이 시위를 하다가 정치깡패들에게 습격을 받아서 다치는 사건이 터지게 됩니다. 그 결과 4월 19일 시위가 대규모로 확산되었고 분노가 폭발한 국민들은 친정부 언론사인 서울신문사를 불태우고 탑골공원의 이승만 동상을 파괴하게 됩니다. 여론은 극도로 악화되었으며 교수들까지 시국선언을 발표하여 '부정선거를 다시 하자'는 구호를 외쳤으며 미국 대사관마저 재선거를 하라고 말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경찰의 발포로 인하여 180여 명의 사망자가 나왔습니다.

이승만 하야 발표하다.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부상들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이제야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한 것입니다. 실제 당시 촬영된 영상을 보면 이승만이 입원자들을 보며 울먹이는데 가까스로 울음을 참는 표정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영상을 보면 정말로 제대로 몰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승만은 병원에서 다친 학생들을 보며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이 젊은 학생들은 참으로 장하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승만은 4월 26일에 시민대표단을 만났습니다. 그중 한 명이 이승만에게 "각하. 하야하셔야 합니다. 이게 국민이 원하는 것'이라고 말했으며 이에 이승만은 "정말로 내가 하야하는 것을 국민이 원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시민대표단은 하야해야 한다고 다시 한번 이야기했고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그 직후 라디오로 하야하겠다는 대국민담화를 발표하며, 대통령 자리에서 내려왔습니다.

이승만 하와이에서 사망하다.

이후 한 달간 이화장에서 거주하면서 찾아오는 학생들에게 용돈이나 주며 지내다가 1960년 5월 29일 하와이로 출국했으며, 이승만은 자신이 과거 오랫동안 활동한 하와이에서 옛 동지들도 만나고 좀 쉬다가 귀국할 예정이었으나, 실제로는 출국을 허가한 이유는 추방이었으며, 결국 이승만의 수차례 귀국 의사는 허정은 물론 박정희 정권에 의해 계속 거절당했으며 아내의 헌신적 내조로 고령의 나이에 비교적 건강하게 지냈던 이승만은 이 일로 충격을 받아 건강이 급속도록 악화되었으며 1964년 6월 말 갑작스러운 급성 위장 출혈로 쓰러진 후 1965년 7월 19일 마우날라니 양로원에서 향년 90세로 일생을 마치게 됩니다.

이승만 초상화

이승만의 마지막 기도

이제 저의 천명이 다하여 감에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셨던 사명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몸과 마음이 너무 늙어버렸습니다. 바라옵건대 우리 민족의 앞날에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함께 하시옵소서. 우리 민족을 오직 주님께 맡기고 가겠습니다. 우리 민족이 굳게 서서 국방에서나 경제에서나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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