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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으면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한국근현대사 - 국가 부도의 날, 1997년 IMF (제2의 IMF 오나?)

by yesssi1990 2023.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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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대한민국 전체는 충격과 슬픔에 빠졌습니다. 한 순간에 국가부도로 인하여 수많은 가장들은 회사에서 잘렸으며, 많은 가정들이 해체되면서 보육원에 버려지는 아이들도 많아졌습니다. 대한민국이 무너진 1997년 IMF 당시 상황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목차>

1. 1997년 긴박했던 국가 부도의날 

2. 대기업 부도시작

3. 버림받은 우리의 아버지들 

4. 집권여당 무너지다.

5. 금모으기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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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7년, 긴박했던 국가 부도의 날 - 국가의 경제 주도권을 외세에 넘겨야 했던, 제2의 을사늑약 

1997년 12월 3일. 대한민국은 IMF(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게 됩니다. 말 그대로 국가에 부채가 많아서 부도 위기에 직면했기 때문에 '자금 좀 빌려줘'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1997년 외환위기로 인하여 기입이 연쇄적으로 도산하게 됩니다. 외환보유액이 급격하게 급감했으며 IMF에 20억 달러 긴급 융자를 요청하였습니다.  외환보유액이 한 때 39억 달러까지 급감했으며, 결국에는 IMF에 195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아서 그 이후에는 한국경제는 IMF가 요구하는 경제체제를 수용하고 그 요구에 따라 국가 경제 구조조정이 시작되었습니다.

 

1997 IMF
1997 IMF 당시 상황에 나온 신문

그 시절 대한민국은 IMF 총재인 캉드쉬에게 '말을 잘 듣겠으니, 제발 돈 좀 빌려 달라'고 했습니다. IMF 구제 금융을 위한 대한민국의 총리와 캉드쉬 총재의 서명식은 예정된 시간보다 10시간 넘게 지연된 이후에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이유는 이런저런 다양한 요구를 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은 총재의 기분을 언짢게 하지 않기 위해서 비위를 맞추어주니라 절절하게 매달렸을 겁니다. 경제자주권을 외세에 넘긴 치욕적인 날이었습니다.

 

2.  대기업들의 부도 행렬

.국내의 기업들은 문어발식 확장으로 무리한 투자를 했습니다. 종합금융사들은 해외 자금을 단기차입으로 빌려와서 기업들에게 투자 자금을 대출해 주었습니다. 당시 대기업들의 부채비율은 무려 500%를 웃돌 정도였습니다. 외환위기 직전의 한국 경제의 구조는 취약하였습니다. 결국 위기는 1997년 한보철강, 삼미, 진로, 대농, 기아, 한신공영 등의 대기업들이 연쇄부도가 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1997 IMF

 

jtbc에서 방영한 드라마 '재벌집막내아들'에도 1997년 외환위기 사태에 대해서 나오기도 했죠, 그중에서 한보철강은 '한도제철'이라는 회사로 나왔으며, 기아는 '아진자동차'로 나오기도 했습니다.  한국에 대한 경제 신뢰도가 떨어지자, 외국 금융사들은 긴급하게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연하게도 채무 상환 기간을 연장해주지 않았습니다. 당장 외국 금융사에 갚아야 할 돈은 1500억 달러가 넘는데, 보유 외환은 40억 달러에 불과하였기에 국가가 파산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결국에 IMF에 구제 요청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외에도 정치권과 기업 간의 정경유착이 심각했으며, 재벌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것 등이 외환위기를 불러일으킨 이유로 꼽히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나라를 이끌어가는 정재계 인사들의 비리와 무능력함으로 국가가 위기에 봉착하게 된 것입니다. 

 

3.  회사를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일만 하던 아버지들은 버림받았다.

IMF는 구제금융을 조건으로 우리나라에 경제 구조조정을 요구하였습니다. 금리를 인상했으며 부실기업을 정리하며 금융시장을 개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은행 금리가 10%에서 30%대로 치솟았습니다. 이로 인해서 부채가 많은 기업들은 줄줄이 무너졌습니다. 무너지는 기업에는 대기업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대한민국 30대 대기업에서 무려 16곳이 파산하였으며 은행도 줄도산했습니다. 기업만 무너졌을까요? 엄청난 금리 인상으로 인하여 대출을 받았던 국민들은 엄청난 빛에 시달렸으며, 회사들의 줄도산으로 인하여 10 가구 중에 4 가구는 실직을 당하거나 회사 부도를 겪게 되어 국민들이 받는 충격이 엄청났습니다. 한 때 실직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리지 못하여 양복을 입은 채 산으로 갔다가 퇴근하는 '등산출근 현상'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회사를 위해서 가정을 위해서 열심히 일을 했던 평범했던 우리들의 아버지들은 졸지에 실직자가 되었습니다. 이게 과연 아버지들이 무능력해서 생긴 일인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라를 이끌어 가는 정치인이나 경제인들의 무능력함과 무책임함으로 인하여 평범한 국민들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재벌집 막내아들'에서는 주인공은 윤현우의 아버지가 몇십 년을 일했던 아진자동차에서 해고를 당한 장면이 나옵니다. 심지어 부당해고로 인해서 시위를 버렸던 사람들을 무참하게 때리는 장면까지 나왔습니다. 

그 시절 뉴스에서는 기업들의 줄도산과 평범한 시민들이 자살했다는 뉴스들만 나왔습니다.  다들 IMF 이후로 경제적인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아 졌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서 이혼하는 가정도 많이 생겼으며 부모가 버린 아이들도 많아졌습니다. 많은 가정이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 대한민국 곳곳에서는 슬픔이 가득했습니다.  국가가 힘이 없으면 피해를 온전히 받는 것은 힘없고 평범한 국민들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조선말 능력 없는 왕으로 인하여 힘없는 백성들이 일제에 의해 처절하게 짓밟힌 것처럼 말입니다.

 

4.  IMF이후 집권여당인 '한나라당' 대선에서 무너지다. 

동남아시아의 연쇄적 '외환 위기' 속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외환관리정책의 미숙함이 IMF 구제금융 상태의 직접적인 원인이었습니다. 당시 대통령이던 김영삼은 강경식 경제부총리와의 통화 이전까지 한국에 닥쳐올 외환위기라는 절체절명의 심각성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IMF가 요구한 경제체제가 시작되자 많은 회사들이 부도 및 경영 위기를 겪기 시작했고, 이러한 과정에서 대량 해고 사태와 경기 악화로 인하여 대한민국의 온 국민이 큰 위기를 겪었습니다. IMF가 일어난 직후인 1997년 12월 18일에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가 치뤄젔으며, 이 선거에서 당시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의 이회창은 국가부도의 책임으로 인하여 야당인 김대중에게 패배하였습니다. 그리하여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후에 집권한 김대중 대통령은 IMF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수용했습니다. IMF가 요구하는 구조조정에 착수했습니다. 대한민국은 IT 산업 장려 정책이나 대기업 간의 사업 교환 및 통폐합으로 경제 재건을 도모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현재의 대기업들이 생겨났습니다. 예로 들면 '현대·기아 / 하이트진로' 등이 있습니다. 김대중 정부는 IT 산업 발전 및 인프라 투자에 대대적인 힘을 쏟았습니다. 

 

1997 IMF
1997년 김대중 대통령 당선

 

5. 금 모으기 운동  

KBS의 '금 모으기 캠페인' 방송으로 1998년 1월 5일 금 모으기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금 모으기 운동에 참여하는 일반인들은 금(순금 24K)을 내놓으면, 전문 감정가가 직접 금을 감정한 확인서를 받게 되며, 수출 후 달러를 당시 환율과 국제금시세로 평가해 나중에 원화로 돌려받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1998년 1월 ~ 4월에 진행되었으며 약 227톤이라는 경이적인 숫자의 금이 모였습니다. 참여한 사람들은 전국적으로 349만 명에 달했습니다. 당시 시세로 21억 7천만 달러에 해당하는 금액이 모였습니다. 당시 언론 보도에 의하면 삼성그룹 대우그룹 등 대기업들도 참여했다고 합니다.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순양가의 여자들이 금 모으기 운동에 참여하는 모습이 생각납니다. 

 

금모으기운동

 

금 모으기 운동은 1998년 4월 말을 끝이 납니다. 금 모으기 운동 기간에 걷힌 금은 약 227톤이었습니다. 전국적으로 4가 구당 1가구꼴로 참여했으며 65g 싹의 금을 내놓은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예정보다 3년이나 앞당겨진 2001년 8월 IMF로부터 지원받은 195억 달러의 차입금을 모두 상황 했습니다. '제2의 국채보상운'이라고 부를만한 수준이었습니다.  본래는 2004년까지 갚도록 예정되어 있었으나 예정보다 3년이나 앞당겨 채무를 정리한 것입니다. 

 

채무 정리는 하였지만, 외환위기는 현재의 대한민국에 후유증처럼 남아 있습니다. 바로 '비정규직'이 늘어났습니다. 외환위기 전에는 대한민국은 엘리베이터 버튼만 눌러주는 소위 말하는 '엘리베이터걸'도 정규직으로 일하던 시절이었으나,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직이 많이 늘어났으며 현재는 일반적인 근로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공무원이 인기가 없었지만 안정적인 일자리 선호 현상으로 인하여 공무원 등의 직업이 비정장적으로 인기가 높아졌습니다. 한 때는 노량진에 공무원 학원이나 고시원들이 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공무원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고학력자들이 취업을 위하여서 하향 취업을 하다 보니 고학력이 필요하지 않은 일자리에서도 고학력자를 선호하는 이상한 현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IMF를 어릴 때 겪었던 현재의 20-30대들은 3포 세대를 넘어서 N포세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결혼, 출산, 취업, 연애 등등 많은 것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아이를 안 낳는 나라가 되어버렸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에 관해서 포스팅을 하고 느낀 점

1997년 외환위기에 대한 내용을 포스팅하면서 느낀 점이 있습니다. 나라를 이끌 지도자를 잘 뽑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능력하고 무책임하고 국민들을 편 가르기 하는 지도자를 뽑게 되고, 그런 사람이 나라를 이끌어가게 된다고 하면 경제, 안보 등 모든 게 튼튼했던 나라도 무너지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지도자들은 자신을 기쁘게 하는 간신배 같은 사람들을 옆에 두고 일을 하게 되며 귀와 눈을 닫고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만 하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과연 책임감 있고 국민들을 생각하고 능력 있는 지도자가 이끌어 가고 있는지 생각을 해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무능력하고 책임감 없는 지도자는 국민들을 고통에 빠트리게 하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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