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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으면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한국 재벌가 썰 - 복이 있는 얼굴을 뽑아야 한다. 이병철 회장과 관상 이야기

by yesssi1990 2023.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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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회장이 삼성이 이끌던 시기에는 삼성그룹 신입 공채 면접관 자리에는 관상가들이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관상을 중요시 여기던 이병철 회장이 관상을 보고 평가를 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병철도 관상이나 사주 관련하여 굉장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한 이병철이 인정한 관상가들에 대해서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목차>

1. 서울을 주릅잡던 관상가 

2. 이병철이 아낀 박재현 

3. 본인의 후계자를 물어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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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을 주름잡던 관상가 

1960년대 초반에 서울에서 유명한 관상가 두 명이 있었다. 백운학우종학이다.  백운학은 종로 보령약국 뒤의 한옥 집에서 살고 있었고, 우종학은 화신백화점(현재 신세계백화점 본점) 뒷골목에 '운수우거처'라는 조그만 팻말을 붙인 집에서 관상을 봐주었다고 합니다. 우종학의 외모는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몸매에다가 눈이 칼날처럼 가늘고 길었다고 합니다. 평안도 사투리를 쓰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신상문제를 정확하게 집어내곤 했다고 합니다. 우종학은 장기 운세보다는 단기 운세를 족집게처럼 잘 맞추었다고 합니다. 당장 당면한 문제를 집어내는 능력은 그 사람의 얼굴 찰색 여부와 관련된다고 합니다. 우종학은 '찰색'을 잘 보았다고 합니다. 

 

찰색 - 빛깔을 살펴보는 것. 주로 얼굴빛을 살펴보는 것을 말한다. 넓은 의미의 찰색은 피부, 가래, 설태(舌苔), 대소변, 대하, 반진(斑疹) 등의 빛깔을 살펴보는 것을 말한다.

 

관상에서는 얼굴의 특정 부위가 빛이 나면서 밝은 색을 띠는가, 아니면 어두침침한 색깔인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그때그때 운세 여부가 달라진다고 합니다. 우종학의 적중률을 경험한 고급 관료나 사업가와 명사들이 운수우거처에 자주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당시 운수우거처에는 집 한 채 값과 맞먹는다는 백색전화가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 백색전화는 체신부 장관이 우종학에게 선물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병철 회장의 친형인 이병각씨도 우종학에게 자주 놀러 왔다고 합니다. 이병각 본인이 관상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관상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누곤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동생(이병철)은 요즘 관상 연구에 몰두해 있다. 시간 날 때마다 항상 관상서들을 들여다본다. 일본에 갔다 오면 일본에서 나온 관상서들도 많이 사가지고 온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일본 관상서들은 간단하게 요점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일반인이 보기에 편했다고 합니다.  우종학이 가지고 있던 관상책들도 형인 이병각을 통해서 이병철에게 전달되곤 했다고 합니다. 이런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이병철은 오랜 세월 동안 관상의 이론과 실전에 대한 공부를 통하여 관상에 대한 내공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병철의 '관상내공'이 삼성의 신입사원 채용이나 간부직원 승진과정에서 일정 부분 작용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병철이 선호하였던 관상은 단정한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단정한 관상은 정징하고 배신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삼성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이유 중에 하나는 이병철 창업자의 관상내공도 한몫하였다고 봅니다. 

 

2.  이병철이 가장 아낀  관상가 <제산 박재현> 

이병철 회장과 박도사(제산 박재현)은 깊은 인연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병철은 제산 박재현을 아꼈다고 합니다. 이병철은 아끼던 박재현을 그의 내공이 절정에 올라있던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 사이에 7년 동안 삼성의 고문으로 있게 만들었습니다. 70년대 초반에서 후반까지의 기간입니다. 월급은 5백만 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70년대 중반에 5백만 원이라는 돈은 중소도시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값이었습니다. 현재로 치면 몇 억을 한 달 월급으로 받아 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금액입니다. 박도사가 맡았던 일은 신입사원 면접을 할 때 입회해 인재를 발탁하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삼성에서 신입사원 뽑을 때 관상을 보았다'는 세간의 소문은 박재현이 진원지였습니다. 인재의 기준은 총명하면서도 배신하지 않고 복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이병철 회장은 학벌에도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기본적인 시험성적은 참고 한다고 합니다. 기본을 통과하면 그다음에는 면접이 훨씬 비중이 높았다고 합니다. 면접의 핵심은 사주, 관상이었습니다.  사주, 관상을 봐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즉, 이 있는가를 보았다고 합니다. 신입사원이 복이 있는 사람이 회사에 들어와야 회사가 잘 된다고 본 것입니다. 머리만 좋고 복이 없는 사람은 회사에 해를 끼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내재되어 있는 '福(복)'이라는 부분을 어떻게 미리 알 수 있을까? 본인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복'이 있는지 없는지 파악하기 위해서 명리학을 공부한 도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병철 회장은 복을 가장 중요시 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제산 박재현은 7년간의 공식적인 고문을 마치고도 비공식적으로 이병철의 요청이 있으면 자문에 응하였다고 합니다. 주로 인재발탁에 관한 자문이었다고 합니다.  박재현은 말년에 '내가 그동안 삼성에 직.간접적으로 추천한 인재가 대략 1천7백 명가량 된다. 지금 생각하니 잘한 일인지 잘못한 일인지 모르겠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추천한 청년들은 삼성에 가지 않았더라도 어지간한 중소기업 사장을 할 정도의 그릇과 복이 있는 인물들인데, 전부 삼성에 가서 월급쟁이를 하도록 추천하였으니 그게 과연 잘한 일인지 잘못한 일인지 모르겠다는 의미로 말한 것입니다. 삼성이 자랑하는 맨파워는 인재발탁에 있어서 이 판과 사판을 모두 고려하는 이병철의 독특한 경영철학에 나온 것입니다. 이병철의 이 판 참모가 제산 박재현이었던 것입니다. 사판이란 '눈에 보이는 자료를 종합분석해서 내리는 판단'을 말하고, 이 판이란 '영감과 직관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자로에 바탕해서 내리는 판단'입니다. 삼성에 지원한 사람의 시험성적이 사판이라고 한다면 관상과 사주는 이 판에 해당합니다.  이병철은 이 두 가지, 즉 이판사판을 종합해야만 판단에 실수가 적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병철 자신도 도사급으로 관상 전문가였으니 이판사판의 둘 사이의 시너지 파악이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이병철 관상가
제산 박재현

제산 박재현은 누구인가?  제산 박재현(1935-2000년)은 대한민국에서 명리학을 하는 학자들은 그의 명리학의 감정실력은 “입신 경지에 이른 분”이라는 찬사를 하고, 그처럼 명성있는 고객들이 찾아오기를 부러워하고, 사주풀이로 부를 이루고, 금의환향한 것을 부러워하며, 그가 남긴 유명인사의 간명집을 구해보려고 혈안이듯 한다고 한다. 그는 젊은 시절 해인사 승려였으나, 환속했다는 항설도 전해온다.

 

3.  본인의 후계자가 누구인지 물어보다.

이병철 회장은 본인의 뒤를 이어서 자신보다 삼성을 크게 번영하게 할 수 있는 후계자가 절실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관상을 중요시 여기던 이병철 회장은 당시 부산에서 명성을 떨치던 명리학자인 제산 박재현을 찾아서 삼성의 후계 구도를 물어봤다고 합니다.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병철은 장차 내 아들 중 누구를 후계자로 정해야 하는지 물어봤고, 제산 박재현은 누구를 후계자로 생각하냐고 물어봤다고 합니다.

 

이병철 회장은 "나는 맹희를 후계자로 하고 싶소만" 이라고 대답을 했더니,
제산 박재현은" 그 아드님은 회장님이 평생 쌓은 성의 수성장이 못됩니다. 수성은커녕 얼마 못 가고 성은 무너져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위와 같은 박재현의 신통력 있다는 예언으로 이병철 회장이 후계를 바뀌어버렸다는 항설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떠돌 만큼 이병철 회장이 박재현을 많이 아끼고 믿었는지 알 수 있는 내용인 것 같습니다.  사실 위 대화 내용도 사실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소문이 돌 만큼 이병철이 박재현의 능력을 믿고 있었다는 것 을 보여주는 일화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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