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펜서 백작의 막내딸로 태어나다.
1961년 7월 1일 노퍽 주에 위치해 있는 왕실 별장이자 외가였던 샌드링엄에서 올소프 자작 존 스펜서와 올소프 자작 부인 프랜시스의 막내딸로 태어났습니다. 다이애나의 이름은 먼 조상인 존 처칠의 외손녀이자 베드퍼드 공작부인이었던 다이애나로부터 따왔다고 합니다. 유럽의 귀족들은 조상의 이름에서 본인이 낳은 자식의 이름을 짓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태어난 샌드링엄은 과거 엘리자베스 2세가 외조부모였던 퍼모이 남작 부부에서 내어준 곳이라고 합니다. 어린 시절은 외갓집이기도 한 이곳에서 보냈다고 합니다.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어린 시절은 대체로 불행했다고 합니다. 부모님은 후계자가 될 아들 출산, 성격 차이 등으로 인해 다이애나가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사이가 많이 좋지 않았으며, 매일같이 큰 소리로 다투며 다이애나의 어머니는 매일 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본인을 보살펴 주는 유모가 자주 바뀌는 등 주변의 환경이 모두 불안정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아버지인 백작이 어머니를 때리는 것을 문 뒤에 숨어서 지켜볼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아버지에게 지쳐 어머니는 다이애나가 6살이 되던 1967년에 다른 남자와 외도를 저지르고 떠나버렸으며, 부모님은 그로 인해 별거가 시작되었으면 다이애나가 8살이 되던 해 이혼을 했다고 합니다.
아버지인 존 스펜서 백작은 그 시대의 상류층 귀족 남성들이 그러하듯이 체면과 명성을 굉장히 중요시 여겼다고 합니다. 저택에서는 매일 파티가 열렸으며, 다른 여자와 재혼까지 했습니다. 자식들에게는 무관심 했으며 본인을 더 중요시 여겼다고 합니다. 불안한 주변환경과 무관심한 부모로 인하여 예민한 유년기를 보낸 다이애나는 인생에 걸쳐 큰 트라우마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로 인해서 조용하고 섬세한 다이애나의 성격은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자라게 됩니다.
보모로 일했던 청년시절
성인이 되어서는 상류층 아이들이 다니는 유치원에서 시간제 보모로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돌보고 도와주는 일이 적성에 맞았다고 합니다. 이 일을 하면서 존재감을 인정받고 행복을 느낄 정도로 아이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당시 유치원 교사의 말에 따르면 진심으로 아이를 좋아하는 것이 느껴졌으며, 풀이 죽은 아이가 있으면 옆에 가서 위로해 주곤 했다고 합니다. 찰스 왕세자와 결혼 후 에도 어려운 이를 위해서 성심성의껏 도와주었으며, 이혼 후에는 더욱더 적극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봉사 활동을 했습니다. 다이애나는 심성이 따뜻한 사람입니다.
먼저 시집갔던 언니들은 아이가 있는 또래 귀부인들을 소개시켜줘서 그들의 베이비시터로도 일했다고 합니다. 이런 내용이 잘못 외전 되어서 평범한 유치원 보모가 찰스 왕세자의 결혼으로 인하여 인생 역전을 했다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존 스펜서 백작의 막내딸이며 작위를 보유한 귀족이었습니다. 다이애나는 생계를 위해 일한 게 아닙니다. 본래 영국의 상류층은 생계를 위해 일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스펜서 가문은 귀족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부유한 가문이었습니다.
공부를 못해서 중등학교 졸업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최종 학력은 중등학교 중퇴라고 합니다. 학력이 짧았던 탓에 제대로 된 정규 직업을 갖지는 못했습니다. 고등학교 중퇴 후 성인이 되자마자 독립해 런던에 있는 아파트를 얻어 친구화 살았으며 그 아파트가 다이애나 소유라서 친구들에게 방세를 받았다고 합니다. 다이애나의 외할아버지인 퍼모이 남작이 손주들을 위해서 세계에서도 땅값 비싼 곳으로 유명한 런던에서 한 명당 한 채씩 아파트를 마련해 준 것입니다. 이렇듯이 다이애나는 시간제로 여러 일을 한 것은 생계를 위한 것이 아닌 일종의 취미 생활에 가까웠습니다.
찰스 왕세자와 결혼하다.
다이애나가 찰스 왕세자의 남동생인 앤드루 왕자와 소꿉친구여서 아주 어릴 때 몇 번 본 적이 있다고 합니다.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찰스가 영국의 왕자에다가 다음 왕이 될 후계자라 조금 관심을 가져 본 적은 있었으나 자신의 남편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고 합니다. 다이애나와 찰스가 서로를 제대로 인식하게 되면서 만난 것은 다이애나가 17세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그 당시에는 그저 지나가는 인연 정도로만 넘겼으며, 그러다가 3년 뒤인 20세 때 다시 만난 자리에서, 찰스는 다이애나의 자상함과 아름다움에 호감을 가지고 교제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호감을 가졌지만 진심으로 사랑한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찰스는 다이애나를 두고 이혼녀인 카밀라 파커볼스와 결혼 후에도 불륜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찰스는 다이애나와 교제를 시작하고 12번의 테이트를 한 후 청혼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 영국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남이자 장차 미래의 국왕이 될 왕세자가 과연 어떤 여성하고 결혼을 하여 왕세자비로 맞이할지가 최고의 관심사였습니다. 스펜서 가문은 다이애나가 왕세자의 약혼자가 되자 광영으로 여기며 크게 기뻐했다고 합니다. 다이내나는 본인의 마음을 다 알기도 전에 주변의 환경으로 인해서 찰스 왕세자와 결혼을 하기로 마음먹었던 것 같습니다. 1981년 2월 24일, 영국 왕실은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스펜서 두 사람의 약혼을 공식을 발표하게 됩니다. 약혼을 발표한 후 5개월 후인 7월 29일 수백만명의 인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찰스 왕세자와 결혼하게 됩니다.
남편의 내연녀 카밀라 파커 보울스, 그리고 불행한 결혼 생활의 시작
남편인 찰스 왕세자는 다이애나와 결혼하기 전부터 연인으로 지냈던 카밀라 파커 보울스라는 내연녀가 있었습니다. 카밀라는 이미 결혼한 유부녀였음에도 불구하고, 둘의 불륜은 지속 되었습니다. 다이애나는 남편의 마음이 본인에게는 없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남편인 찰스가 본인과 결혼한 이유가 <왕세자비라는 자리에 앉혀 놓기 위한 적당한 인형을 마련하기 위함>이었음을 깨닫고 절망하게 됩니다. 사실 다이애나는 연애 시절에도 찰스가 카밀라와 불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이미 약혼이 발표된 후였고 친정 식구들도 영국 왕실도 결혼을 강요했다고 합니다.
찰스는 '왕위 계승권'과 '사랑'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영국 국민들를 눈속임하여 젊고 아름다운 데다 혼전순결한 '성공회 신자'인 다이애나와 사랑도 없는 결혼을 한 것입니다. 심지어 다이애나와의 신혼여행 중에도 카밀라사 건물한 커프스를 달았다고 합니다. 이런 일화를 보면 찰스 왕세자는 소시오패스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본인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불행도 아무렇지 않은 모습입니다, 다이애나는 당연히 "카밀라와 관계를 끝내라."고 여러 번 요구했습니다. 아내로서 당연한 요구였으나 찰스는 오히려 "다이애나가 괜한 걸로 트집 잡아 오해한다." 며 뻔뻔하게 카밀라와의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여자였으면 왕위 계승권도 포기하고 사랑을 지켜야 하는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찰스 왕세자는 남자로서 인간으로서 최악입니다. 찰스는 카밀라와 불륜을 지속하였으며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다이애나는 자살 시도에 거식증과 폭식증으로 심신이 지쳐갔습니다. 심지어 다이애나가 첫 아이 윌리엄을 임시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다이애나가 자의로 계단에서 구르는 사고가 일어난 적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배에 타박상을 입은 것으로 끝났고 태아는 무사했습니다.
남편인 찰스 왕세자의 불륜도 다이애나 결혼 생활에서 큰 고통이었지만, 고통의 다른 이유는 다른 왕족들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왕족들은 대부분 딱딱하고 감정 표현을 지나치게 절했다고 합니다. 다이애나의 회고록에 따르면, 다른 왕족들은 감성적이며 진심으로 국민들을 대하는 다이애나를 골칫덩어리라고 여겼다고 합니다. 외부인 출신인 며느리들을 은근히 소외 시켰으며, 중요한 일에도 번번이 제외시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왕족들에 비해서 훨씬 더 국민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다이애나에 대한 악의적인 기사를 타블로이드를 통해 내도록 지시했으며, 왕실이 결정한 일도 다이애나가 문제인 것처럼 이미지 메이킹 하기 바빴다고 합니다. 이런 내용을 보면 다이애나가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의 불화로 인하여 불안정한 생활을 하였고 결혼을 해서도 시댁 식구들에 의해서 마치 외부인처럼 취급받았기 때문입니다.
다이애나의 왕실 생활이 계속될수록 왕궁 내에 그녀의 적들이 많아졌습니다. 찰스 왕세자의 귀족 친구들은 다이애나를 향한 악의적인 기사를 내도록 지히샜으며, 궁정인들은 다이애나의 전화를 도청하고 휴지통을 뒤기도 하였습니다. 다이애나를 향한 감시와 악의적인 소문에다가 폐쇄적인 왕실 생활은 다이애나의 불안감과 우울감은 최고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왕족들과 귀족들에게 질려버린 다이애나는 자신들의 아들들에게는 감정 표현을 솔직하게 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자라날 수 있게 가르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다이애나가 인생에 제일 사랑한 남자들, 윌리엄과 해리
다이애나는 찰스 왕세자의 진심 어린 사랑은 받지 못하였지만 슬하에 두 아들인 윌리엄 왕세자와 해리왕자를 낳아 차기 대통을 잇는 왕세자비로서의 의무를 다했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신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상하듯이 아들들을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으로 양육하였습니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왕의 자녀들의 양육은 유모에게 맡기는 왕실이지만 다이애나는 이례적으로 모유를 먹이며 두 아들을 직접 돌보는 양육법을 고수했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따스한 보실팜 아래 어린 시절을 보낸 윌리엄과 해리는 현재 영국 왕실을 상징하는 세대로 성장하였습니다. 두 아들들은 왕실에 오만 정이 떨어진 다이애나가 망므를 붙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자 가족이었습니다. 그녀는 본인의 어린 시절처럼 부모의 이혼으로 아들들이 불행해질까 봐 마음에도 없는 지옥 같은 결혼 생활을 15년 간 지속했습니다.
윌리엄 왕세자나 해리 왕자는 다이애나가 죽은 지 곧 있으면 30년 가까이 되어가지만 어머니를 아직도 그리워하며 보고 싶어 하고 있습니다. 어린시절 어머니가 그들에게는 든든한 존재이면서도 큰 사랑을 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다이애나 자유로워지기로 결심하다.
왕세자 부부의 화목한 모습으르 바라는 영국 국민들을 위해서 왕실은 끊임없는 언론플레이를 했습니다. 다이애나는 불행한 결혼 생활을 지속하였지만 언론플레이에 맞춰 웃으면서 손을 흔들며 화목한 모습을 보여주는 거짓된 생활을 반복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될수록 다이애나의 관심은 왕실 내부가 아닌 외부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왕세자비라는 지위로 대외 활동에 나섰으며 가장 낮은 자를 위해서 일하는 다이애나에 대한 영국 구민의 인기는 매우 높아졌습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영국 왕실은 다이애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규제하며 다이애나를 통제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분노한 다이애나는 더 이상 참고만 있지 않게 됩니다.
찰스 왕세자와 불륜을 저지르던 불륜녀 카밀라 파커 보울스 보란 듯이 당시 승마 교관과 맞바람을 피우는가 하면, 왕실 근위병 및 경호원들과 연애를하며 염문서울 뿌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왕실 전기 작가의 손을 빌려 자신의 불행한 결혼 생활과 왕실의 비인간적인 면모를 모두 폭로하고 고발하는 책을 출판하고 나서 1992년 12월 9일부터 찰스 왕세자와 별거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당시에 찰스와 다이애나의 불화설이 조금씩 언론에 보도가 되고 있었다. 이때를 틈타서 찰스의 귀족 친구들은 마치 찰스와 다이애나의 결혼을 망친 주범이 다이애나인 것처럼 왜곡된 내용의 기사를 내게 합니다. 끼리끼리는 과학이라는 게 여기서 이렇게 입증되게 합니다. 눈물겨운 찰스 왕세자 친구들의 우정입니다.
이로 인해서 결국 10년 간 참고 있었던 다이애나는 폭발했고, 그것이 책을 집필하게 되는 이유였습니다. 별거에 돌입한 다이애나는 왕실에서 생활할 때보다는 자유로워졌으나, 다이애나를 향한 파파라치와 각종 언론들의 폭발할 것 같은 관심에 마음이 점점 피폐해졌습니다. 결혼 새 오할 정리와 의전 문제를 마무리 짓느라 시간이 흐르는 동안 1995년 11월 BBC와 인터뷰한 다이애나는 "왕실과 남편이 체면치레를 위해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며 대놓고 비난을 하였습니다. 결국 1996년 8월 29일 찰스 왕세자와 지옥 같던 결혼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이혼 후 '전하'라는 경칭은 사용할 수 없게 되었지만, 영국 왕위 계승 서열 2위와 3위 왕자의 어머니라는 점을 참작하며 '왕세자비'라는 직함은 유지하였으며, 찰스 왕세자와 양육권을 나누어 가졌습니다. 이전부터 살던 켄싱턴 궁전에 계속 거처할 권리화 함께 1,700만 파운드에 달하는 고액의 위자료를 받았습니다.
약자를 위한 활발한 사회활동
이혼 전에도 자선과 봉사에 열성적이던 다이애나는, 이혼 후에도 활발한 자선과 봉사활동을 하게 됩니다. 다이애나는 테레사 수녀와도 가까워졌는데, 공교롭게도 1997년 8월 31일 다이애나가 의문의 교통사고로 급서한 뒤 1주일도 지나지 않은 같은 해 9월 5일 테레사 수녀도 선종하게 됩니다. 세계의 언론들은 "세계는 연인과 어머니를 모두 잃었다"며 추모했습니다.
왕세자비 시절부터 자선사업과 봉사활동에 적극적이었던 다이애나는 이혼한 뒤 더욱 활발한 행보를 보이며 아프리카 빈민촌 구호와 적십자 활동 등에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이애나가 참여 했던 다양한 자선 및 봉사활동 가운데서도 특이 애착을 가졌던 사업은 대인지뢰제거 운동이었습니다. 대인지뢰 추방 국제캠페인에 적극 관여해 앙골라, 보스니아, 르완다 등을 직접 방문하기도 하였습니다. 다애이나 사망 직후인 1997년 하순에는 대인지뢰 금지 국제운동 본부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며 다시금 주목받기도 했습니다. 세계의 모든 약자를 위하여 이처럼 열성적이고 진심 어린 다이애나의 사회 활동을 두고 전 세계가 감동했으며, 다이애나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습니다. 그에 비례해 불륜을 방조하고 권위주의에만 심취해 있던 영국 왕실의 인기는 형편없이 떨어졌습니다.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인한 비극적인 죽음을 맞다.
1987년 8월 31일, 프랑스 파리, 00시 20분, 리츠칼튼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호텔이 제공한 메르세데스벤츠 W140 S클래스에 탑승한 다이애나와 알파예드를 파파라치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쫓아갔습니다. 00시 23분, 벤츠는 파파라치들의 카메라를 피하기 위해 속력을 높였다가, 그만 중심을 잃고 퐁드랄마 지하차도 기둥에 충돌하고 맙니다. 운전사 앙리폴과 다이애나의 연인 도디 알파예드는 충돌 순간에 즉사했으나, 다이애나와 경호원 리스 존스는 아직 살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파파리치들은 그녀를 신속히 구출하거나 신고하기는커녕 그 상황에서도 카메라를 들이대며 플래시를 마구 터뜨려댔습니다. 00시 30분, 충돌 약 10분 뒤에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으며, 5분 뒤 구급차가 뒤이어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파파라치들은 사진을 찍어대니라 방해를 했으며 구조를 더디게 했습니다. 01시 00분, 심하게 파손된 차량 상태로 인해 다이애나는 사고 발생 30분이 지나서야 차에서 꺼내졌습니다. 심폐소생술로 간신히 맥박이 다시 뛰긴 했지만, 프랑스 응급 의료 서비스인 SAMU는 어째서인지 20분이 지나서야 도착했고 현장 이탈 또한 20분이나 지나고 이뤄졌습니다. 결국 사고 발생 후 약 2시간 만에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며, 다이애나는 새벽 4시에 사망하게 됩니다. 20세에 왕세자비가 되어 15년 간의 불행한 결혼을 끝내고 자유로워진 다이애나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36세의 짧은 삶이었습니다.
지금도 다이애나의 죽음에는 많은 의문설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세게에서 알아줄 정도로 높은 수준인 프랑스의 응급 의료 서비스 SAMU가 다이애나에겐 즉시 이뤄지지 않앗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영국 왕실이 이혼 후 다이애나의 행보에 불만을 가지고서 암살을 했다는 소문이 아직도 대중들에게 전해지고 있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제일 밑에 있던 약자들을 진심으로 사랑한 다이애나 왕세자비, 전 세계인지 추모하다.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갑작스러운 사고사는 세계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습니다. 특히나 다이애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대단했던 영국 국민의 상실감은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영국 국민들 한 명 한 명 모두 다이애나를 정말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했기 때문입니다. 다이애나의 행보는 왕실에 대한 거부감이나 반발이 강했던 노동자 계층이나 서민 계층, 심지어 공화주의자 계층에게도 진심으로 사랑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사고 당시 뉴스 영상을 보면 다이애나가 차사고로 심각하게 부상당했다는 말이 나왔을 때는 오히려 괜찮을 거라고 웃어넘겼지만, 그녀의 부고를 전해 듣자마자 전부 경악을 넘어 충격으로 할 말을 잃고 뉴스만 봤으며 영상 속 기자도 울음을 참느라 울먹이고 있었습니다. 다이애나의 사고는 영국인 상당수에게 슬픔을 안겨주었습니다.
다이애나의 죽음에 대하여 찰스 왕세자와 이혼하여 왕실을 떠난 다이애나의 죽음에 쌀쌀맞은 태도로 일관 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엘리자베스 2세가 머물던 버킹엄 궁전 앞에도 다이애나의 죽음에 대한 애도와 항의의 표시로 꽃다발이 쌓여갔으며, 쌀쌀맞은 태도가 지속된 왕실의 태도는 영국 국민들의 매우 커다란 분노를 불러왔습니다. 왕실의 차가운 반응에 대해 엄청난 상실감을 느끼던 영국 국민들 사이에서는 왕실이 다이애나를 파국으로 몰아넣었다는 여론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인해 영국 왕실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이례적으로 극도로 커져갔으며, 당시 영국 총리였던 토니블레어가 이례적으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다이애나의 죽음을 왕실이 추모할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왕실은 기존의 입장을 번복하여 다이애나의 장례식을 왕실장으로 치르고 전 세계에 텔레비전으로 방영했습니다. 당시 왕실에 대한 국민들의 여론은 수백 년 만에 최악을 찍었으며, 왕정 폐지의 지지율이 사상 처음으로 50% 육박하는 영국 왕실 역사상 존재 자체를 위협받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입니다.
다이애나, 영국 국민들의 영원한 왕세자비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죽은 이후에도 영국 국민들이 제일 사랑하는 왕세자비로 남아있습니다. 짧은 생이었지만 왕족이라는 권위를 내려놓고 가장 낮은 이들을 위해 진심으로 사랑하며 자선과 봉사의 삶을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이애나의 사생활로 인해서 좋게 보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결국에는 다이애나도 유부남들과 불륜을 저지른 경우가 많았기 대문입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그녀가 세상 제일 낮은 곳에서 힘들어하는 이들을 위해 진심으로 다한 사랑은 누구나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국 국민들의 영원한 왕세자비 '다이애나' 그녀가 하늘에서는 편안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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