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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으면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조선의 역사 - 공주의 남자가 되다 - 조선의 공주, 옹주의 남편 '부마'

by yesssi1990 2022.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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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남자
드라마 공주의남자 경혜공주의 남편 '정종'

평범한 남자가 재벌 총수의 딸에게 장가들면 그의 인생은 어떻게 될까요?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신분이 단번에 바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문화차이는 간극이 크기 때문에 감내해야 할 것입니다.

 

이 간극은 조선시대 왕의 사위인 부마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왕의 사위가 되면 '위(尉)'라는 관작이 주어지게 됩니다.

본관이 경주이면 경주 위, 진주면 진주 위를 받게 됩니다. 품계 같은 경우에는 공주의 남편은 종1품, 옹주의 남편은 종 2품입니다. 

 

현재에 비유하자면 종1품은 부총리급, 종 2품은 차관급입니다. 상당히 높은 관작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역전을 이루었던 왕의 사위인 부마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목차>

1. 공주와 옹주의 결혼은 어떻게 하게 될까

2. 조선판 남자 신데렐라 

3. 아내가 아닌, 상전 

4. 재혼금지법

 

1. 공주와 옹주의 결혼은 어떻게 하게 될까?

드라마 태종 이방원의 '이방원'

공주와 옹주들은 간택제도를 통해 선출된 남자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왕족도 일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중매결혼을 했습니다.

서로 마음에 드는 집안끼리 중매를 통해 결혼을 했던 것이죠.

 

태종의 딸인 6번째 딸 신빈신 씨가 낳은 정신옹주가 시집갈 때가 되자,

지화라는 유명한 점쟁이를 시켜서 궁합이 잘 맞는 남자를 찾아보라고 명했습니다.

지화는 여러 양반집들을 돌며 부마가 될만한 남자를 찾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춘천군수를 지냈던 '이속'의  집에 갔는데 이속은 지화에게 "내 아들은 여종의 딸에게 장가보낼 수 없다. 내 아들은 죽었다. 하지만 상대가 정혜옹주라면 살아있을 수도 있다"라고 말하면서 지화를 내쫓았다고 합니다.

 

정신옹주의 어머니인 신빈신 씨는 원경왕후 민 씨를 모시던 여종이었고,

정혜옹주의 어머니인 의빈권 씨는 간택까지 받아 후궁이 된 명문가의 양반 출신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내 아들을 천한 신분이 어머니인 정신옹주에게는 귀한 아들을 장가보낼 수 없다고 돌려서 깐 것입니다.

어머니의 신분이 여종이었다고 하지만 태종의 딸로서 고귀한 왕족이었던 정신옹주를 무시한 것에 태종은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합니다.

자신의 딸인 정신옹주를 무시한 것에 왕실을 기만한 죄로 이속을 잡아 곤장 100대를 때린 후 전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그를 노비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속의 아들은 평생 결혼하지 못하게 하는 벌을 내렸습니다. 

 

아무리 어머니가 여종 출신이었다고 하지만 태종의 딸인 정신옹주를 그렇게 무시했던 이속의 패기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패기로 인하여 전 재산을 몰수당하였으며 본인은 노비가 되고 아들은 장가를 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말 한마디로 집안이 풍비박산 났던 것이죠. 제가 태종이라고 하더라도 충분히 그랬을 것 같습니다.

자신의 딸을 무시한다는 것은 본인을 무시하는 것이고, 본인을 무시한다는 것은 조선 왕실을 모독하는 것이니까요. 

이 일이 있은 후부터는 부마는 간택령에 의해 선택되었고 부마로 간택이 된다고 하면 좋든 싫은 무조건 왕의 사위가 되어야 했습니다. 

 

권력자, 왕의 딸 공주와 옹주에 대한 포스팅

 

조선의 역사 - 조선의 로열 패밀리 공주와 옹주의 차이는?

조선의 로열 프린세스 공주와 옹주 조선 역사에서 왕들은 본부인인 왕비와 다른 부인들인 후궁들을 두고 있었다. 에서는 왕의 정실부인인 왕비한테서 낳은 딸을 공주라고 하고, 측실(후궁)이 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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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선시대의 남자 신데렐라, 왕족으로 한 번에 신분 상승하다.

부마가 된다고 하면 재산도 천문학적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토지가 공주에게는 850 결, 옹주에게는 800 결이 지급되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전통 토지법은 수확량 단위인 결부법입니다.

면적 기준이 아닌 수확량 기준인 것입니다. 조선 초기의 1 결의 수확량은 20석입니다.

부마가 되면 1년에 1만 6000석 이상의 쌀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양의 토지를 하사 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집도 한옥으로 40칸이나 50칸까지 웅장하게 지을 수 있었습니다.

 

무능력하거나 세상에 큰 뜻이 없는 사람에게는 최고의 선택입니다.

신분이 양반인데 능력이 없는 남자라고 한다면 공주의 남자가 되는 것만큼 드라마틱한 신분상을 할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능력이 있고, 야망 넘치는 남자에게는 우울증이 생길 수 있는 일입니다.

부마와 공주는  사랑으로 이어진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간택제도라는 법에 의해 일방적으로 선택당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 없는 혼인, 아내를 상전으로 모시는 부담, 명예직만 전전하는 정치활동 등으로 부마는 동기부여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3.  아내가 아닌, 상전으로 모시는 결혼생활 

부마는 남자로서의 자존심과 권력을 모두 포기해야 합니다. 공주나 옹주가 먼저 세상을 떠나도 재혼은 불가능합니다.

젊은 나이에 공주나 옹주가 죽게 되면 부마는 다시는 장가들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부마들은 대부분 계실이 아닌 첩으로 아내를 앉혔습니다. 원칙적으로는 양인 첩도 둘 수 없었으나 이 부분까지는 엄격하게 지켜지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철종의 사위인 박영효는 12세에 영혜옹주를 베필로 맞았습니다. 그러나 혼인 석 달 만에 옹주가 죽었습니다.

박영효는 재혼하지 못하고 대신에 첩을 두었으며 자녀들은 서출이 되었습니다. 정식 아내로 재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마 재혼 문제가 화두에 오른 것은 성종 때입니다.

 

임금은 부마에 대한 네 가지 지침을 내렸습니다. 재혼 금지, 양민 첩 금지, 자녀의 벼슬길 금지, 후사는 양자 법제화입니다.

신하들은 크게 반발하였습니다. 그러나 임금은 "고귀한 공주와 옹주의 제사를 첩의 아들이 모실 수 없다. 부마는 재혼을 하지 말고,

첩도 얻지 말고, 후사는 양자를 들이라"라고 확인사살을 한 것입니다. 

 

사건의 시작은 세조의 왕녀인 의숙공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의숙공주는 정인지의 아들은 정현조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의숙공주는 후사 없이 숨을 거두었으며, 정현조는 양반 이징의 딸과 재혼했습니다.

이때부터 정현조의 혼인이 재혼인가, 축첩인가 논란이 일었습니다. 조선은 1부 1 처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정식으로 혼인한 사람만이 아내이고, 첩은 법률상으로나 사회 관념상으로나 아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종은 13년(1482년) 5월 2일 부마의 재혼과 축첩에 대해 걱정한다.

임금은 의숙공주의 남편인 정현조와 경혜공주의 남편인 강자순이 양반가의 딸과 재혼한 과정을 묻습니다.

혼인가, 축첩인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경혜공주는 문종의 딸로 단종의 누나입니다.

반성위 강자순은 "첩은 천인보다는 양인이 좋을 것으로 여겼습니다. 운성부원군 박종우도 양가의 딸을 첩으로 삼은 전례를 참고했습니다"라며 계실이 아닌 첩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정현조에게 딸을 준 이 징은 첩으로 시집보냈으나 정실이 될 것으로 믿은 정황을 진술했습니다.

"정현조와 예에 의한 혼서가 오가지 않았습니다. 정현조의 어머니가 글과 물품을 보내왔습니다.

신이 망령되게 박종의 첩은 뒤에 적실로 되었다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우선 첩으로써 성혼을 한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성종은 부마가 양인을 첩으로 삼은 것은 잘못임을 판결했습니다. 다만 소급하여 적용할 수 없으니 인정하고,

차후는 사족의 딸을 첩으로 삼으면 처벌할 것을 선언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하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시집살이가 아닌 며느리살이가 시작되다. 자신의 아들이 부마가 되면 그 부모들은 며느리를 모시고 살기 시작합니다. 

공주든 옹주든 신분 자체가 왕족이라는 그 시대에 최고의 다이아몬드 수저여서 며느리에게 깍듯이 존댓말을 했어야 했으며,

시집살이는 커녕 며느리 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당시 효도는 중요한 덕목 중 하나였지만 공주나 옹주는 시부모에게 절을 안 해도 괜찮았습니다.  왕의 딸이라는 존귀한 신분은 시대의 중요한 덕목인 '효'도 예외적으로 적용되었습니다.  

 

4.  부마의 재혼을 법적으로 금지시키다.

공주가 죽은 뒤 부마의 재혼은 중종 13년(1518년) 10월 15일 다시 논의됩니다.

삼정승이 연명으로 “부마는 공주가 죽은 뒤 재취하지 못함은 예부터 근거가 없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다”며 악습임을 주장했습니다.

조선의 법문(法文)에 규정되지 않았는데 정현조의 사례로 인해 폐습이 되었다는 논리였습니다.

법적 근거가 없고, 인륜에도 어긋나기에 폐기되어야 할 불문법이라는 주장에 대해

중종은 “평민은 아내 사후 재혼을 자유의지로 선택한다. 부마도 이 준례와 같이 할 것” 이라면서도 명문화에는 반대했습니다.

부마의 재혼여부 논란은 숙종 때 마침표를 찍습니다. 숙종 7년(1681년) 7월 26일 부마재혼 금지법이 통과됐다.

예조의 결론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부마의 재혼은 조선역사에 없었다. 둘째, 재혼 금지의 의미가 크고 내력도 깊다. 셋째, 부마가 자식이 없으면 동종(同宗)의 지자(支子)를 후사(後嗣)로 세운다."  결국에는 부마의 재혼은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게 되었습니다. 

 

왕의 사위이자 공주와 옹주의 남편인 부마가 된 다는 것은 분명히 좋은 일이긴 합니다.

엄청난 재산을 가지게 되고,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단번에 왕족으로 신분이 승격됩니다.

당대의 최고 권력가의 친인척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얻는 것도 많은 만큼 잃은 것도 많았습니다.

제일 크게 잃는 것은 '자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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