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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으면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한국 재벌가 역사 - 재벌집 막내아들 이건희

by yesssi1990 2022.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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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하면 떠오르는 수식어들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이라고 하면 다들 어김없이 '삼성'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대부분일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삼성은 처음부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이 아니었습니다.

현재의 삼성을 만든 삼성그룹 제2대 회장 이건희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목차>

1. 재벌집 막내아들 이건희 

2. 형들을 제치고, 삼성의 황태자로 등극하다.

3. 홍라희와 결혼

4. 영면에 들다.

 

 

1.  재벌집 막내아들 이건희 

1942년 1월 9일, 일제강점기 당시 경상북도 대구에서 이병철과 박두을의 삼남으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이건희는 얼마 안 가 부모님의 품을 떠나 아버지인 이병철 고향인 경상남도 의령군 할머니댁에서 3살 때까지 자랐다고 합니다.

엄마인 박두을의 품에 처음으로 안긴 게 4살 때여서 그전까지는 할머니가 엄마인 줄 알고 자랐다고 합니다. 

 

그가 서울에 올라온 건 부친 사업장이 서울로 옮겨 온 1947년, 여섯 살 때였습니다.

가족들과 처음으로 한 지붕 아래 모 여살 수 있게 되었지만, 초등학교 5학년 때 "일본을 배워야 한다”는 부친의 뜻에 따라

현해탄을 건너가면서 또다시 가족과 헤어졌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형과 자취생활을 했기 때문에 사실 이 시기에는 이건희 남매 모두 부모와 함께 모인 자리는 손꼽힌다고 합니다.

이러한 환경 탓인지 이건희 성격 또한 내성적이 되어 이럴 때부터 말수가 적었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서 놀고 사색하는 시간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건희 어린시절
이병철과 어린시절 이건희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보낼 때는 대학생 형들이 아버지의 일본인 첩과 몸으로 육탄전으로 싸울 때, 어렸던 이건희는 어려서 싸움을 피했다고 합니다. 이 싸움으로 인해 장남인 이맹희는 아버지인 이병철에서 죽기 직전까지 맞을 뻔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부터 부자 사이는 영영 회복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6.25 전생 때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국했으며, 한국에서 남은 10대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이건희에게 황태자 자리를 빼앗긴 이맹희에 대한 포스팅 

 

한국 재벌가 인물 - 재벌집 막내아들 진영기의 실존 모델 '이맹희'

삼성의 황태자로 태어나다. 1931년 6월 20일 경상남도 의령에서 이병철과 박두을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대구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후 이후 도쿄 농업대학 및 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미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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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시절 동창인 홍사덕이 한 인터뷰에 따르면 "미국에서 차관을 많이 들여와야 미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우리의 안보가 튼튼해진다는 등 공장을 지어서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라는 등" 10대의 남자 고등학생이 생각하기 힘든 독특한 사고를 가졌었다고 합니다.

 

이때도 이건희는 딱히 말이 없었으며 행동도 느릿느릿한 학생이었다고 합니다. 공부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친구들이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사냐고 물어보면 "나는 사람 공부를 제일 많이 한다."라는 답변을 했다고 합니다.

 

사람공부를 제일 많이 한다는 게 거짓은 아니었던 일화가 있습니다.

아버지인 이병철 회장의 눈 밖에난 삼성의 인원이 쫓겨난 적이 있었는데, 고등학생이었던 이건희가 아버지를 찾아가 설득하자

이병철은 두말하지 않고 그 임원을 회사로 다시 불러들였다고 합니다.

 

아버지인 이병철도 인정한 고등학생이던 이건희 사람 보는 눈이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남달랐던 그의 사람 보는 눈은 삼성을 세계 유수의 기업으로 키울 수 있게 하는 밑바탕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2.  형들을 제치고, 황태자로 등극하다.

사실 이건희는 삼성그룹 후계자에서는 먼 막내 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형들을 제치고 막내아들인 이건희가 후계자가 되어 삼성 경영권을 물려받기까지는 약 20년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합니다.

 

1966년. 이건희의 둘째 형인 이창희가 '한비 사건'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구속되고,

맏형인 이맹희가 밀수에 관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삼성은 당시로선 거액인 2천400만 원의 벌금을 냈으며,

이병철 회장은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한비 지분 51%를 국가에 헌납한 후 경제계에서 은퇴해야 했습니다.

창업주이자 오너가 물러나는 큰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서른여섯이던 이맹희는 삼성의 총수 대행으로 10여개 부사장 타이틀을 달고 활동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장자상속이 원칙이던 시절이라 삼성의 경영권이 장남인 이맹희에게 넘어갈 듯 보였지만,

한비 사건 이후 이어진 혼란과 청와대 투서 사건 등으로 인해서 아버지와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고, 해외를 떠돌게 됩니다.

 

이후 이병철 회장은 자서전에서 "주위 권고와 본인 희망이 있어 맹희에게 그룹 일부의 경영을 맡겨봤는데도 6개월도 채 못 돼 맡긴 기업은 물론 그룹 전체가 혼란에 빠져 본인이 자청해 물러났다"라고 회고했습니다.

 

이후 이병철 회장은 1971년 막내아들 이건희에게 삼성을 맡기기로 결단을 내립니다.

그렇게 이건희는 아버지 이병철 밑에서 후계자 수업을 받게 됩니다. 

삼성가 희귀사진
반도체공장에 방문한 이병철, 이건희, 홍진기, 어린시절 이재용

1차 오일쇼크로 경제가 휘청이던 1974년에는 흑백TV가 주력제품이었던 삼성전자의 이병철 회장이 "반도체는 산업의 쌀"이라며 반도체사업 진출을 선언하는 데 큰 전기를 마련한다. 

 

당시 반도체사업 진출을 머뭇거리던 이병철 회장을 설득한 것은 아들인 이건희 회장이었습니다.

동물적인 사업감각의 소유자였던 이병철 회장도 아들이 반도체 얘기를 꺼내면 "이놈아, 그 돈이면 TV를 몇백만 대나 더 만들 수 있는데 그 쪼그만 것 만드는 데 쓰겠다는 거냐"며 답답해했다고 합니다. 

 

'TV 하나도 제대로 못 만들면서, 최첨단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거나 '미국 일본보다 20~30년 뒤처졌는데,

따라가기나 하겠는가?'는 회의론도 나왔다고 합니다. 

 

지금이야 반도체 하면 '삼성'을 떠올리는 시대가 됐지만, 그때만 해도 한국반도체 인수는 말도 안 되는 공상과 같은 이야기였다. 

일본의 한 기업 연구소는 '삼성이 반도체를 할 수 없는 다섯 가지 이유'라는 보고서를 내놓으며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건희는 "언제까지 그들의 기술 속국이어야 하는가"라며 "기술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일에 삼성이 나서야 한다"며 사

재를 털어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인수, 오늘의 삼성전자로 키운 것입니다.

 

이러한 결단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이건희가 1970년대 미국에서 유학 당시에 실리콘밸리를 다니면서 첨단 하이테크 산업만이 살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어서 얻은 결과였습니다.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서 해외여행은 꿈도 못 꾸던 시절 미국 유학에서 얻은 깨달음이지만, 기회가 있다고 하더라도 깨닫고 실천하여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건희
이건희

 

 그렇게 후계자 수업을 받아오던 중,  아버지이자 삼성그룹의 창업주인 이병철이 사망한 1987년에 그룹 회장이 되었습니다.

 

1993년 6월 '신경영'을 주장하며 이후에 자신의 모토로 기업의 경영이념으로 삼았습니다.

이건희가 삼성을 이끌던 이 시기에는 삼성전자는 세계 유수의 굴지의 기업들을 제치고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올라서게 됩니다.

 

아버지인 이병철 회장과 함께 한국의 반도체 산업을 일으킨 주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건희가 취임 당시 삼성그룹의 연매출은 10조도 안 되었지만,

이건희 취임 후 30년간 경영하면서 삼성그룹의 연매출은 약 400조 원으로 무려 40배 가까이 늘어났습니다.

 

특히 반도체 산업 같은 경우에는 '미친 산업'이라고 불릴 정도로 불확실성이 큰 사업 분야였습니다.

그런 분야에서 미국, 일본에서는 중소 제조업체 취급을 받던 삼성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으니 경영 실적만 두고 보면

이건희의 경영능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의 주인공 진도준의 실존모델이 이건희라고 합니다.

진도준도 드라마에서 엄청난 능력으로 승승장구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경영 능력만 본다고 하면 재벌집 막내아들의 주인공은 진도준 보다 훨씬 더 뛰어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도준은 이전 생의 기억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시작을 하게 되지만 이건희는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순수하게 본인의 능력으로

삼성그룹의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웠기 때문입니다.

 

3.  홍라희와 결혼을 하게 되다. 

아내인 홍라희는 아버지인 이병철의 권유로 맞선을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홍라희가 이건희 아버지인 이병철의 국전 관람을 안내했다가 눈에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후에 이병철은 홍라희 아버지인 홍진기와 혼담을 주고받았으며, 두 사람의 만남을 추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 여대생이었던 홍라희는 "나는 누구의 아내로 살기 싫어요"라며 아버지들끼리 추진한 정략결혼을 퇴짜 놓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가 집안의 어른들은 둘의 결혼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결국에는 일본에 유학 중이던 이건희와 일본 도쿄에 있는 한 호텔에서 맞선을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만남 후 호감을 가지게 된 두 사람은 그다음 날부터 데이트를 시작해서 9개월간 연애를 즐기고 이듬해인 1967년에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이건희와 홍라희 결혼식
이건희와 홍라희 결혼식 사진

여담이지만 이건희 어머니인 박두을 며느리감인 홍라희의 키가 커서 자신의 아들이 기죽을까 봐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결혼을 반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건희가 미래의 아이들을 위해서 키 큰 여자를 아내로 맞는 게 좋다고 하면서 설득했다고 합니다.

이건희의 선구안은 여기에서도 빛나는 것 같습니다. 그의 자식들은 이재용, 이부진, 이서현 남매는 키가 크기 때문입니다. 

 

이건희의 아내 홍라희에 대한 포스팅

 

한국 재벌가 역사 - 재벌집 막내아들 모현민의 실존 모델 - 삼성의 숨은 조력자 홍라희

1947년 7월 15일 법무부장관, 내무부장관을 지낸 홍진기와 그의 아내인 김윤남의 장녀로 전라북도 전주에서 태어났습니다. 판사로 전주에서 근무 시 태어난 장녀인 딸을 보고 너무나도 기뻐서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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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와 가장 많은 닮은 자식, 리틀 이건희 이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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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진, 그녀는 삼성그룹의 제2의 창업자라고도 불리는 이건희의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리틀 이건희라고 불리며 본인의 경영능력을 발휘하며 호텔신라를 이끌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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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영면에 들다.

이건희 장례식
이건희 장례식

이건희는 2014년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져서 자택 인근 병원에서 심폐소생술을 받고,

서울 일원동에 있는 삼성서울병원으로 이송되어 이후네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아왔습니다.

 

한 때 혼수상태에서 회복해 재활치료도 받았지만, 끝내 병상에서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2020년 10월 25일  삼성은 이 회장의 사망 소식을 전하며 장례는 "고인과 유가족의 뜻에 따라 간소하게 가족장으로 치르기로 했다"라고

전했습니다. 이후 수원에 위치해 있는 가족 선산에 묻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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