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알고 있으면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조선의 역사 - 가장 귀하게 태어나 외롭게 살다 죽은 비운의 황녀 '덕혜옹주'

by yesssi1990 2022. 12. 22.
반응형

소설과 영화로도 유명한 덕혜옹주, 그녀는 대한제국 고종 황제가 60 가까이 넘어서 얻은 귀하게 얻은 늦둥이 딸이었습니다.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났으나, 사랑하는 가족들로 죽음으로 인하여 정신병을 얻고 비참하게 살다가 죽은 덕혜옹주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목차>

1. 고종의 귀한 늦둥이 딸

2. 원치 않던 일본 유학 

3. 비극으로 끝나버린, 결혼 생활

4. 그리웠던 조국 대한민국, 소녀는 노인이 되어 돌아오다.

5. 덕혜옹주에 대한 의견

 

1.  환갑이 넘어 얻은, 귀한 늦둥이 딸 

덕혜옹주는 고종의 늦둥이 딸로 태어났으며, 순종, 의친왕, 영친왕의 이복 여동생입니다. 

당시 고종의 일상을 기록한 덕수궁 찬시실(오늘날의 비서실) 일기에는 오후 '7시 55분 양춘기가 여자 아기를 탄생합니다.

오후 8시 20분에 태왕 전하가 복녕당에 납시었다.'라고 하여 덕혜옹주의 탄생과 함께 고종이 직접 산모를 찾아갔음을 기록하였습니다.

대게 일주일은 지나야 산모를 찾는 관례에 비추어 보면 고종의 행동은 굉장히 이례적이었습니다.

 

아무래도 환갑이 넘어 얻은 늦둥이 딸이 그만큼 귀여웠기 때문입니다.

덕혜의 탄생 이후 고종은 늘 덕혜와 함께 했으며, 심지어 자신의 거처인 함녕전으로 덕혜를 데리고 옵니다. 

고종이 환갑 때 얻은 늦둥이이자 당시 유일한 고명딸이어서, 덕혜옹주는 고종의 극진한 총애를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이런 일화도 있습니다. 

'유모 변복동 상궁은 누워서 덕혜옹주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다. 변 상궁은 일어나 예를 갖추려 하였지만, 고종은 덕혜옹주가 놀라거나 울까 봐 유모를 일어나지 못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천하의 황제 폐하 앞에 누울 수 있는 것은 변 유모뿐"이라고 사람들이 말하고 다녔다. 덕혜옹주는 덕수궁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에는 '덕수궁의 꽃'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고종의 딸 사랑이 어땠는지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덕혜옹주 어린시절
동그라미 안에 있는 어린아이가 덕혜옹주

 1916년 4월에 고종은 덕수궁의 준명당에 다섯 살 난 덕혜를 위한 유치원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덕혜가 외롭지 않게 동년배 친구들과 함께 다닐 수 있게 하였으며,

준명당의 건물 바깥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둥근 홈이 파여 있는데, 아이들이 놀다가 행여 다칠까 봐 난간을 설치한 흔적이라고 합니다.

늦둥이 딸을 위한 아버지의 세심한 배려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함녕전에서 준명당까지는 짧은 거리였지만 덕혜는 가마를 타고 등교했으며, 유모 변복동이 수행했습니다.

고종의 장례식
고종의 장례식 행렬

서로 애틋하던 두 부녀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승하한 것이다.

덕혜의 나이 고작 8살이었다. 개인적인 슬픔을 말할 것도 없었으며 부친의 죽음은 덕혜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다.

 

고종 승하 후 덕혜는 거처를 함녕전에서 어머니(귀인 양 씨)가 있는 광화당으로 옮겼다가 이후에는 창덕궁 관물헌에 거처를 잡았다.

조선 황실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일제는 대한제국 왕족에게 철저한 일본식 교육을 주입하려고 했다.

 

1921년 4월 덕혜는 일본 거류민이 세운 일출소학교에 입학했다. 입학 당시까지도 덕혜는 '복녕당 아기씨'로 불렸는데,

이때에 이르러 '덕혜'라는 이름을 순종에게 공식적으로 받게 된 것이다.

 

'복녕당 아기에게 덕혜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순종실록> 1921년 5월 4일 기록.

 

덕혜라는 작호는 이복오빠 순종이 1921년에 내려준 것이다. 그 이전에는 따로 이름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 한국에 있는 기록에 따르면 '아기씨', '복녕당 아기'로만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귀국했을 때 대한민국 호적에도 '이덕혜'가 성명으로 올라갔다. 사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덕혜옹주는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병합되어 멸망한 이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면 대한제국의 황녀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가 흔하게 알고 있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라는 타이틀은 사실 맞지 않다. 대한제국에는 황녀가 없었고, 조선의 마지막 왕녀는 철종의 외동딸인 '영혜옹주'이다.

덕혜의 불은 일본인 학교에 입학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일제는 영친왕에게 그랬듯 덕혜에게도 일본 유학을 강요했습니다. 일제의 압박게 굴복한 순종은 1925년 3월 24일 덕혜의 동경 유학을

명하였으며, 14세의 어린 소녀는 정든 궁월을 떠나서 일본이라는 낯선 땅으로 발이 디디게 됩니다.

 

조선의 역사 - 로열패밀리인 공주와 옹주 차이점에 대한 포스팅 내용입니다.

 

조선의 역사 - 조선의 로열 패밀리 공주와 옹주의 차이는?

조선의 로열 프린세스 공주와 옹주 조선 역사에서 왕들은 본부인인 왕비와 다른 부인들인 후궁들을 두고 있었다. 에서는 왕의 정실부인인 왕비한테서 낳은 딸을 공주라고 하고, 측실(후궁)이 낳

youneedmee.tistory.com

반응형

2.  원치 않는 일본 유학을 떠나다.

1925년 3월 30일 덕혜가 동경에 도착해서 간 곳은 오빠인 영친왕과 그의 부인인 이방자 여사가 거처하던 집이었습니다.

 

이방자여사는 수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덕혜옹주가 도착한 날 밤 그의 침대 곁에 한동안 앉아 있었다.

조용히 잠든 앳된 얼굴에는 애수가 서려 있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며 아픈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당시 대한제국 황족들은 대게 일본으로 끌려가 사실상 인질이 되었기 때문에,

덕혜옹주는 황족과 화족의 영애들이 다니는 학교인 '여자가쿠슈인'에 편입학되었습니다.

 

친왕부부는 덕혜옹주가 본인들의 저택에서 지내며 학교에 통학하는 것을 희망했으나,

일본의 반대로 옹주는 고향에서도 떠나오자마자 가쿠슈인 내에 있는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게 되며,

훗날 덕혜와 이방자여사는 40여 년 만에 낙선재에서 노년의 모습으로 재회하게 됩니다.

기숙사 생활을 하던 이 무렵 덕혜를 더욱 슬프게 한 것은 오빠 순종의 죽음과 생모 양 씨의 죽음이었습니다.

덕혜옹주 어린시절
덕혜옹주 일본 유학시절

가쿠슈인에서의 유학 생활을 시작하다.

여자가쿠슈인에 다닌 동기들 중에서는 메이지덴노의 외손녀인 소마유키카가 있었습니다.

유키카는 덕혜옹주를 안타깝게 여겼고, 독살이 두려워서 보온병에만 물을 담아 마신다는 말을 듣자 덕혜옹주에게

"나는 덕혜 님 입장이라면 조국의 독립운동에 나섰을 텐데, 왜 아무것도 하지 않나요?"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덕혜옹주는 이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가쿠슈인 학생들은 선생의 지시에 따라서 덕혜옹주에게 '토구에 사마(덕혜 님)'이라는 존칭을 쓰며 예의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당시 일본 황실에서 황족의 딸은 이름의 뒤에 -미야를 붙이고, 화족의 딸은 이름의 뒤에 -키미를 붙였습니다.

 

본래 히메는 고귀한 신분의 여인을 전반 칭하는 말이었습니다.

구 대한제국 황족들은 일본에서는 왕공족이라고 해서 황족도, 화족도 아닌 애매한 취급을 받았는데

그것이 '님'이라는 호칭에서도 드러난 것입니다.

 

하지만 황족영애는 물론 화족영애까지 다니던 가쿠슈인에서 친구들에게 '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것은

상당히 높은 대우를 받은 것에는 틀림없었습니다.

 

가쿠슈인 유학시절 신경쇠약, 몽유병, 조현병 등 다양한 정신질환을 얻게 되다.

덕혜는 일본에서 내내 신경쇠약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다 1929년 5월 30일 어머니인 귀인 양 씨가 끝내 유방암으로 사망하게 되자,

이때 처음으로 몽유병과 조현병 증세를 보였다고 합니다.

 

병에 걸린 이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추측이 있습니다.

황실의 호적에 올라간 탓에 생모인 귀인 양 씨와는 공식적으로 남남이 되어

어머니의 장례식에 자녀로서 3년 복상을 하지 못한 것에 크게 상심했기 땜누이라는 것과,

이 시기에 일제가 덕혜옹주의 신랑감으로 일본 방계 황족인 야마나 시나노미야후지마로 왕을 거론했으나

얼마 되지 않아 없던 일이 된 것으로 인한 충격 때문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일본 황족과의 결혼이 엎어져서라기보다는 그동안 축척 되어 있던 정신적으로 힘든 일이 많이 있었는데,

어머니인 귀인 양 씨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것 같으며, 또한 아버지가 식혜를 먹고 얼마 안 돼서

의문사 후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유학을 가 고립된 된 생활을 하였으며 평소에도 독살에 대한 공포를 말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겪은 정신적인 충격과 어린 나이에 낯선 타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게 되면서 겪은 스트레스로 인해서

정신질환을 얻게 된 것 같습니다. 

 

3. 비극으로 끝나 버린, 결혼 생활 

고종은 덕혜옹주가 8세에 황실 시종 김황진의 조카인 김장한과 약혼을 시켰습니다.

원래는 김황진에게 아들을 달라고 하였으나, 김황진에게 아들이 없다고 하자 고종이 "그러면 조카라도 달라''고 해서 맺은 혼약이었습니다.

하지만 고종이 세상을 뜬 후 약혼은 무효화되고, 일본은 덕혜를 일본인과 결혼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영친왕과 이방자 부부 모두 자신들에 이어 어린 옹주를 정략결혼의 희생양으로 삼으려 든다며 해당 혼사를 굉장히 불쾌하게 여겼으며

강력하게 반대했다고 합니다. 특히나 이 시기 이미 몽유병과 조현병 증세를 보이던 덕혜를 치료할 생각도 하지 않고 매국노 한창수라는 인물이 자신의 공적을 높이기 위해 결혼을 서둘러서 진행한 탓에,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는 덕혜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더욱더 반대를 해서 어떻게든 혼담을 깨려고 노력했다고 했으나,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덕혜옹주와 남편
덕혜옹주의 결혼식 사진

1931년 5 월 8일 조선의 백성들은 일본에서 들려온 소식에 크게 분노하였습니다.

덕혜가 대마도 백작 '소 다케유키'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일제에 의한 정략결혼으로 일본인 아내를 맞은 영친왕과 같은 운명을 밟게 되었습니다.

당시 조선일보는 신랑의 얼굴을 삭제한 결혼식 사진을 실어서 조선 백성들을 분노한 민심을 대변하는 것 같았습니다.

 

당시 궁녀들 사이에서는 덕혜의 남편이 애꾸눈에 키가 작은 못생긴 남자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실제 사진을 보면 남편은 소 다케유키는 훤칠한 미남이었으며, 동경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당대의 최고 엘리트이자 시인이기도 했습니다.

 

결혼 1년 후에는 딸 정혜가 태어났고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덕혜는 얼마간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러나 망국의 공주로서 어릴 적부터 겪어온 정신적 스트레스가 컸던 탓인지 덕혜는 결혼 후 조현병에 시달리게 됩니다.

 

남편은 집에서 덕혜를 간병하다가 결국 1946년 정신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일제의 패망 후 소 다케유키는 더 이상 귀족의 지위를 유지하지 못했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져서 감당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덕혜는 법적인 보호자였던 영친왕이 남편과 합의를 통해 이혼했습니다.

 

1956년 딸 정혜의 실종과 죽음은 덕혜의 마음을 더욱더 아프게 하였습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어린 나이에 부모도 여의고 남편에 자식까지 떠나보냈기 때문입니다.

망국의 옹주에게 다가온, 인간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가혹한 운명은 결국에는 정신병원 입원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대한제국이 망하지 않았으면, 소 다케유키는 어떠한 대우를 받았을까? 공주의 남자 '부마'에 관련한 포스팅 내용입니다.

 

조선의 역사 - 공주의 남자가 되다 - 조선의 공주, 옹주의 남편 '부마'

평범한 남자가 재벌 총수의 딸에게 장가들면 그의 인생은 어떻게 될까요?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신분이 단번에 바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문화차이는 간극이 크기 때문에 감내해야 할

youneedmee.tistory.com

 

딸 마사에(정혜)의 실종

덕혜와 딸 마사에(정혜)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버지 다케유키가 재혼할 즈음에 1955년에 1살 위인 스즈키노보루라는 일본인과 결혼하여 분가하였습니다.

노보루는 마사에와 마찬가지로 와세다대학 영문과 출신으로 중학교 교사이자 시인이었습니다.

 

결혼한 후, 일본인들이 흔히 하는 것처럼 마사에게 남편의 성씨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마사에는 '소'라는 성씨를 유지하고 남편이 마사에의 성씨를 따라 '소 노보루'가 되었습니다.

 

이유는 장인어른인 소 다케유키의 요구였다고 합니다.

결혼 한지 1년 후인 1956년 8월 26일 아침, 새댁이었던 마사에는 유서를 남기고 실종되었습니다.

이때 마사에게 현해탄에 뛰어들어서 자살했다는 루머도 돌았으나, 유서에 의하면 마사에는 야마나시현과 나가노현을 경계로 하는

고마가타케 산에 자살하러 간다고 했다고 합니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후 마사에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케유키는 죽을 때까지 마사에의 사망신고를 하지 않아 법적으로 생존 상태에 있었지만, 다케유키의 사후 마사에의 이해 관계인에 의하면

'일본 민법 제30조 조항'에 따라 마사에의 실종신고 후 7년이 지날 때까지 어떠한 생존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종 선고가 성립되어 결국에는 사망 처리 되었습니다.

 

실종 후 50년이 지나서 마사에(정혜)의 사체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품인 수첩으로 신원을 특정하여 마사에의 사망이 실체적으로 확인된 것입니다.

마사에는 왜 결혼한 지 1년 만에 자살을 하러 간 것일까?

정신병으로 인하여 어린 시절을 행복하게 보내지 못하게 하였던 어머니에 대한 미움 때문이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본인이 본인의 목숨을 끊기 위해서 떠나던 마사에(정혜)의 심정은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추측이지만 정신질환을 앓던 어머니와 함께 지내면서 딸인 마사에도 영향을 받지 않은 게 싶습니다. 

 

4.  그리웠던 조국 대한민국, 소녀는 노인이 돼서 돌아오다.

해방 이후 흐릿한 정신 속에서도 덕혜는 어린 시절을 보낸 고국의 궁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이 무렵 서울신문의 김을한 기자가 덕혜의 안타까운 소실을 듣고 귀국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조선 황실의 존재에 정치적 부담을 느낀 이승만 정부는 덕혜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박정희 정부 시절에 탄원서를 올린 끝에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국을 떠난 지 37년 만이었습니다.

 

당시 김을한 기자는 박정희에게 덕혜의 귀국을 요청하였는데, 그때 박정희는 고종에게 딸이 있었느냐? 고 하며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왕위 계승권도 없었으며 어린 나이에 일제에 의해서 일본으로 유학을 갔던 덕혜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많이 잊힌 상태였던 것입니다. 

 

덕혜가 한국으로 돌아오던 날까지 유모 변복동은 살아 있었는데,

덕혜옹주가 탄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착륙하자 창덕궁에서 순정효황후 윤 씨가 보낸 상궁들과 함께 입국장 앞에서

비행기를 향해 큰절을 올리며 연신 "아기씨!"라고 불렀으며, 덕혜옹주의 안 좋은 모습을 보고 통곡했다고 합니다.

 

돌아온 덕혜옹주는 주변 사람들을 거의 알아보지 못했지만,

창덕궁으로 돌아오자 옛날 기억이 살아났는지 궁 안을 돌아볼 때 연신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자신을 맞이한 친척들 앞에서 옛 황실 예법을 그대로 따라 황실의 큰 어른이 되는 순정효황후 윤 씨에게는 모로 꺾어 큰절을 올리고,

아랫사람 되는 이우의 아내 박찬주가 자기한테 절을 할 때는 앉아서 고개만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신이 좋지 못한 상태였지만 본인이 조선의 궁으로 돌아왔으며, 고종의 하나밖에 없는 딸로서 왕족임을 확실히 인지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습니다. 이후에 죽을 때까지 잠깐씩 정신을 차릴 뿐 끝내는 정상인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덕혜옹주의 간병 및 간호는 유모인 변복동과 올케인 이방자 여사의 몫이 되었습니다.

변복동은 1972년 80세를 끝으로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덕혜옹주만을 걱정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진심으로 덕혜옹주를 사랑으로 키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덕혜옹주 변복동
맨 왼쪽 유모 변복동과 왼쪽에서 두 번째 덕혜옹주

덕혜옹주가 고국으로 귀국한 지 10년이 지난 어느 날, 창덕국 낙선재 일본인 노신사가 찾아왔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덕혜옹주의 전 남편 '소 다케유키'였습니다.

당시 낙선재의 지배인으로 있던 이공재한테 다케유키는 "옛 아내를 한 번 만나게 해 달라"라고 간청했지만,

이공재는 당시 덕혜옹주를 정신병원에 가둬버리고 이혼했다고 알려진 그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만나봤자가 옹주가 할 이야기도 없으며, 이미 이혼한 사이니 만나야 할 이유도 없고,

당신을 만나게 된다면 옛날 생각이 나서 오히려 병세가 더 악화가 될 것이니 당신 같은 사람한테는 면회를 일절 허용하지 않으니 썩 돌아가라고 하면서 그를 매몰차게 쫓아내 버렸다고 합니다.

 

결국 소 다케유키는 덕혜를 만나지 못한 채 그대로 일본으로 떠났고, 이후 죽을 때까지 덕혜옹주와 재회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소 다케유키가 덕혜옹주를 왜 찾아왔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

랑이라기보다는, 어린 시절부터 쌓아온 충격과 스트레스로 인해서 정신을 놓은 아내를 끝까지 책임져 주지 못한 미안함이 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인해서 소 다케유키는 일본에서 한국까지 와서 덕혜를 보려고 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소 다케유키가 나쁘다고는 말 못 하겠습니다. 그는 최선을 다해서 덕혜를 지키려고 노력했으나,

여러 한 상황으로 인하여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라고 하더라도 정신병을 가지고 있는 아내를 온전히 돌보기는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에서 그리워하던 조국으로 돌아온 덕혜는 낙선재에서 살다가 1989년 4월 21일 76세를 일기로 창덕궁 수강재에서 사망하게 됩니다.

장례식은 4월 25일에 황실 가족상으로 치러졌으며 시신은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유릉 능역에 안장되었습니다.

귀하게 태어났지만, 고통과 슬픔을 겪다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5.  덕혜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 

덕혜옹주는 일제강점기의 평범한 조선의 백성인 여성들 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당시 일제 치하에서 조선의 평범한 여인들은 위안부로 끌려가고 핍박받으면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덕혜옹주가 독립운동도 하지 않고 일본의 아래에서 부유하게 살았던 것이 아니냐며 비판적으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당시 시대상 일반적인 공주/옹주들의 삶과 비교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조선의 공주/옹주들은 대부분 덕혜옹주처럼 호강하며 살다가 어른들이 정한 부마와 혼인해서 정치적이나 대외적인 역할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살았으며 여자로 태어난 그녀들에게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으며 교육도 딱 그만큼만 시켰기 때문입니다. 

 

덕혜옹주가 조선을 위해서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이유는, 그녀가 고종의 딸로 태어난 왕족이었다는 것뿐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웅적인 서사가 있는 독립운동을 했었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시대적 상황이 좋지 못하여 의지와 상관없이 망국의 황녀가 되어버렸고 어릴 적부터 정신병을 앓고 있던 여성에게

죽음이라는 두려움도 이겨내어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헌신하는 독립투사가 되길 바랐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겪은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낯선 타국인 일본에 강제적으로 유학을 떠난 어린 소녀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요? 

물론 여성의 몸으로 독립운동을 하신 위대한 독립운동가 분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덕혜옹주가 일제의 그늘 아래서 호위호식한 왕족이라고 말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