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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으면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신라 역사 - 삼서지제, 세 명의 남편을 두었던 '선덕여왕'

by yesssi1990 2023.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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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제27대 국왕이자 기록상 확인되는 한국사 최초의 여왕입니다. 연호는 '인평', 골품은 성골입니다. 진평왕과 마야부인 사이의 첫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화랑세기>에서는 천명공주와의 위아래가 뒤집혀 차녀로 기록되어 있지만 주류 사학계에서는 장녀로 결론이 난 상태이다. 남편은 <삼국유사>에서는 음갈문왕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화랑세기>에서는 추가적으로 김용춘, 을제까지 포함하여 3명의 남자가 선덕여왕의 남편이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하지만 <화랑세기>는 역사적인 가치는 인정받지 못하는 자료입니다. 한반도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선덕여왕

 

 

<목차>

1. 선덕여왕의 공식적인 남편

2. 풍월주 김용춘, 남편이자 책사

3. 세 남편 제도

4. 남편이 세명이지만,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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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덕여왕의 공식적인 남편 - 음갈문왕 한국사 최초의 국서

인기 드라마였던 선덕여왕에서 공주 덕만은 혼인을 거부하고 왕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힙니다. '삼국사기'에서도 선덕여왕의 남편에 관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연표에 해당하는 왕력 편에 수수께끼와도 같은 기록이 한 줄 등장합니다. "왕의 배필은 음갈문왕이었다."오직 삼국유사에서만 언급된 이 내용을 토대로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본래 '갈문왕'은 왕, 왕비의 아버지, 동생 등 중요한 왕족에게만 주는 칭호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여왕의 남편'도 포함한다는 설이 생겼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음갈문왕'은 누구였을까? '음'이 인명이라고 한다면 글자가 비슷한 반이란 이름을 잘못 썼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선덕여왕의 아버지인 진평왕의 동생이 백반과 국반이 있는데, 두 사람은 모두 갈문왕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이 두 사람 중 한 명이 선덕여왕의 남편이라는 설이 떠올랐으나 정확한 증거는 없습니다.

 

국서란 ? 여왕의 남편에 부여되는 칭호로서, 부마에서 변화된 의미입니다.

 

그런데 '삼국유사' 기이 편에는 정반대 기록이 나옵니다. 당 태종이 향기 없는 모란꽃의 그림을 보내자 선덕여왕은 "내가 짝이 없음을 놀린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음갈문왕'이 일찍 죽었거나 사실혼 관계에 그쳤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결국 현재로서는 선덕여왕에게 남편이 있었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증거는 없습니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공식적이지 못한 남편이 한 명이 있었다고 보는 게 맞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2. 풍월주 김용춘, 남편이자 책사 

<화랑세기>에 나오는 풍월주 김용춘 편에 따르면, 진평왕이 덕만공주의 남편감으로 점찍은 인물이 진지왕의 아들이자 덕만의 오촌 당숙인 용춘이 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김용춘은 덕만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진평왕에게 덕만과의 혼인을 극구 사양해 보았지만, 진평왕은 덕만과의 혼인을 명했다고 합니다. 왕명을 어길 수 없었던 김용춘은 덕만과 밤을 함께 하곤 했다고 합니다. 혼례식을 치르지 않았으며, 연인 관계로 지낸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상 근친혼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덕여왕의 아버지인 진평왕이 덕만과 용춘을 이어준 목적이 있습니다. 김용춘이 덕만을 정치적으로 보호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훗날 여왕으로서 신라를 이끌 덕만을 위한 보호 장치 중 하나였던 셈입니다.  최고 신분인 '성골'이지만 여자인 덕만이 여왕으로 즉위하면 신라 내부에서 반발이 심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용춘은 한편으로는 덕만의 연인 역할도 했지만, 정치참모의 역할도 했습니다. 연인 겸 참모가 되는 것은 이후 덕만의 다른 남자들에게 똑같이 적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여자 후계자에 대한 불안한 시선을 의식한 조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덕여왕 남편
설명을 돕긴 위한 이미 - 드라마 선덕여왕

 

원래부터 덕만에게 여자로서 마음이 전혀 없던 김용춘은, 자식이 생기지 않는 것을 핑계로 덕만에게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덕만에게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던 탓인지 몰라도 단호했던 진평왕도 할 수 없이 용춘의 형인 용수에게 덕만을 모시도록 했다고 합니다.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관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촌 당숙들과 연인이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덕만과 용수 사이에서도 자식이 생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지내다가 용수가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덕만은 다시 혼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덕만이 다시 남자를 얻은 것은, 죽은 아버지인 진평왕을 이어 즉위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선덕여왕이 된 덕만은 엣 남자인 용춘을 불러들여 정식 남편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때 여왕의 남편은 단순히 한 여자의 남편이 아니라 사실상의 국정 책임자가 되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용춘은 덕만의 곁을 떠나고 싶어 했습니다. 용춘은 덕만에게 여자로서 매력을 전혀 느끼지 못한 것 같습니다. 최고 권력을 얻을 수 있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선덕여왕을 떠나고 싶어 한 것을 보면 말입니다.  정말 왕의 명령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식 남편이 되었지만 용춘이 정치참모로서 사퇴의사, 즉 선덕여왕과 이혼을 하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하자, 이에 당황한 신라의 정부에서는 후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세 남편의 제도'라는 것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3.  세 남편 제도란

'세 남편의 제도'란 김용춘 외에 두 명의 '부남편'을 두어서 총 세 명의 남자가 여왕을 모시도록 하는 제도였습니다. 이때 흠반이라는 사람과 함께 '부남편'에 오른 인물이 바로 을제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상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후궁과 같은 개념의 부남편 제도입니다. 용춘이 선덕여왕의 곁을 떠날 경우에 대비해서 신라정부가 '세 남편의 제도'를 만들어둔 것은 참으로 시의적절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선덕여왕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용춘이 결국 여왕을 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정실 남편인 용춘이 사라짐에 따라 두 명의 후궁 남편 중 누군가가 용춘의 자리를 대신해야 했습니다. 이때 흠반을 제치고 '정실' 장리를 차지한 인물이 바로 '을제'였습니다. 이는 선덕여왕 원년(632) 2월에 을제가 국정을 총괄하게 되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하는 대목입니다.


부남편이었던 을제가 여왕을 보좌하게 되면서 용춘이 여왕의 남편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것은, 을제가 여왕의 정치참모가 되는 한편 여왕의 공식적인 남편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조선시대로 치면 중전의 자리로 올라온 것입니다. 사료에 단 한 차례 등장한 이후로는 을제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선덕여왕의 남편이 바뀌었다는 기록도 없는 것으로 보아서, 을제가 여왕의 남편 겸 참모의 역할 무난히 수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 세 남편이 있었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았던 선덕여왕

삼서지제, 글자 그대로 한 여자에게 남자 세명을 들인다는 뜻입니다.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후계자를 낳기 위해서 들인 '씨내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어는 씨받이가 있습니다.  삼서제는 제도를 뜻하는 '제'라고 표현되고 있는 것을 보면 신라시대에 어느 정도 제도화, 일반화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삼서제도는 선덕여왕의 후사를 위해서 만들어진 제도입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같은 기존 역사서를 통해서 신라에서는 왕위계승권을 독점한 특권 신분계층인 성골 남자는 선덕여왕의 아버지인 진평왕을 끝으로 씨가 말랐습니다. 진평왕이 죽자 남은 성골은 선덕과 진덕 두 여자뿐이었습니다. 

 

성골 남자의 소멸을 맞이한 신라의 지배층에서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분주하게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선덕여왕의 낳은 왕위계승권자인 아들을 낳게 하기 위한 삼서제입니다.  성골 남자의 씨가 마른 상황에서 얼마 남지 않은 성골 중 하나인 선덕여왕에게도 아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다음 왕위의 계승권이 문제 되기 시작하는 시점이었습니다. 

 

선덕여왕의 첫째 남편인 용춘에게서도 자식을 낳지 못했으며, 용춘은 선덕과 이혼하고 싶어했습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신라의 고위관료들은 모여서 논의해서 결정을 내린 것은 삼서 지제였습니다. 바로 흠반과 을제에게 선덕을 함께 보좌하게 한 것입니다. 바로 위에서 말한 부남편들입니다. 말이 좋아서 부남편이지 씨내리로 간택된 것입니다. 세 남편까지 맞은 선덕은 결국에는 자식을 낳지 못했습니다. 남자들의 문제라기보다는 선덕여왕이 불임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결국에는 선덕여왕은 후사를 보지 못하였으며, 후계는 사촌 여동생인 승만공주 '진덕여왕'이 즉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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