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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으면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한국 재벌가 인물 - 재벌집 막내아들 진영기의 실존 모델 '이맹희'

by yesssi1990 2023.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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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의 황태자로 태어나다.

1931년 6월 20일 경상남도 의령에서 이병철과 박두을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대구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후 이후 도쿄 농업대학 및 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미시간주립대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등 일본과 미국 유학생활을 두루 거칠 정도로 명실상부한 삼성의'황태자'에 어울리는 20대 시절을 보냈습니다.

 

재벌집 막내아들 진양철의 첫 째 아들 진영기의 실존 모델?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는 순양그룹의 창업주인 진양철의 장남인 진영기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의욕은 넘치지만 경영 실력은 좋지 못한 인물이죠. 아버지인 진양철의 탁월한 사업감각과 명민함은 물려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아버지 진양철 회장은 장남인 진영기를 못 미더워하죠.  실제로 이병철 회장도 장남 이맹희의 경영실력에 대해서 굉장히 못 미더워했다고 합니다.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이병철 회장도 장남인 이맹희에게 삼성그룹을 물려주고 싶어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및 미국 유학을 두루 거치게 했으며, 귀국 후에는 삼성의 중요 보직을 주면서 입지를 다지게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경영능력이 부족하여서 아버지 눈 밖에 나서 동생인 이건희에게 삼성의 후계자 자리를 뺏기게 됩니다. 

 

사카린 밀수사건, 왕자의 난 그리고 아버지 이병철과의 사이는 돌아오지를 못 할 강을 건너게 된다.

한국으로 귀국한 이맹희는 1960년에 한일은행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2년 후 1962년 안국화재(삼성화재의 전신)로 직장을 옮겼으며 이후에 미풍산업-삼성물산-중앙일보-삼성문화재단-삼성전자 등 삼성그룹 내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일을 배웠습니다. 이병철 회장의 장남으로서 삼성 그룹을 물려받을 후계자 과정을 착실히 밟아나간 것입니다. 하지만 사카린 밀수사건 터지면서 아버지 이병철 회장이 일선에 물러나게 되면서 삼성그룹을 맡아보게 됩니다.  하지만 불같고 저돌적이며 급한 성격 탓에 삼성의 창업 공신들과의 마찰이 심해서 뒷말이 많았으며, 경영 실적도 좋지 않아서 삼성 그룹 전체가 휘청이는 지경까지 가게 됩니다. 결국에는 2년 뒤인 1968년 아버지인 이병철 회장이 삼성그룹 경영 일선에 복귀하면서 그룹 후계구도에서 독보적이던 위상도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여기에다가 동생인 이창희가 1969년에 일으킨 왕자의 난으로 인하여 이병철 회장의 눈 밖에 완전히 벗어나게 됩니다.  본인은 왕자의 난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강력하게 부인하지만, 아버지인 이병철 회장은 이맹희도 왕자의 난에 같이 참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후에 삼성그룹의 7개 계열사의 임원직을 맡았던 이맹희는 1973년 부사장 자리 3개만 남겨놓게 되면서 삼성그룹의 후계구도에서 탈락하게 됩니다.

 

이병철 회장의 아내이자 이맹희의 어머니인 박두을과 삼성가의 오래된 심복인 박윤갑 등이 장남인 이맹희를 강력하게 지지했기 때문에 이병철도 이맹희를 후계구도에서 완전히 제외하는 데까지 오랫동안 고민 했다고 합니다.  이후 완전히 후계구도에서 멀어진 이맹희는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크게 좌절하여 일본으로 떠났을 때, 이병철 회장이 일본을 찾았는데도 불구하고 공항에 마중 나가지 않았고 도쿄지점 직원들과 회식을 하며 지시를 하는데 제동을 걸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에 이병철 회장은 자신의 권위에 대한 반기를 든 것으로 보고 관계가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고 이맹희는 이후에 회상했으며, 자식으로서 자존심을 죽이고 아버지에게 고개를 숙였으면 관계 개선이 돼서 후계구도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맹희 역시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돌아올 수 없을 만큼 멀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 귀국 후 야인 같은 삶을 살다. 그리고 이병철의 납치 사건..?

일본에서 귀국한 이맹희는 겨울에는 사냥하러 다니고 여름에는 워커힐에서 말을 타는 등 야인에 가까운 생활을 하는 수준에 이르게 됩니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게 됩니다. 주로 경북 지역에 있는 별장에 머무르면서 지냈다고 합니다. 이때 이맹희에 따르면 납치 시도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삼성에서 후계자인 이건희를 위해서 본인을 정신병원에 감금하려고 했었다고 합니다. 본인이 엽총을 난사하면서 극렬하게 저항을 했기 때문에 납치사건은 미수로 끝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게 진실이라고 한다면 막장 드라마가 따로 없습니다. 1987년 아버지인 이병철 회장이 사망한 후 후계자로 내정된 셋째 동생인 이건희가 삼성그룹의 회장이 되면서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직책에서도 완전히 물러나게 됩니다. 

 

아버지인 이병철의 유언에 따라 장손이자 이맹희의 맏아들인 이재현의 몫으로 내정되었던 제일제당은 1993년 삼성그룹에 분리 독립한 뒤 오늘날의 CJ그룹으로 출범하게 됩니다. 이병철은 아들인 이맹희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을 만큼 미뭐했지만 이맹희의 아내이자 맏며느리인 손복남과 그녀가 낳은 이미경, 이재현은 굉장히 애정을 주었다고 합니다. 특히 손자, 손녀 통틀어서 첫 손녀이자, 장손녀인 이미경 CJ 부회장에게는 특별한 애정을 쏟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미경 부회장의 졸업식이나 발표회 등이 있을 경우에는 모든 스케줄을 취소하고 손녀딸을 위해서 학교를 방문했으며, 항상 손을 잡고 다녔다고 합니다. 아마도 본인과 틀어져서 해외를 떠돌며 아버지 노릇을 해주지 못한 이맹희를 대신해서 손녀, 손주들에게 애정을 쏟은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혼외자, 친자 소송을 걸다.

이맹희가 아버지인 이병철과 멀어지게 된 계기중 하나는 바로 혼외자식 논란으로 화제를 모았던 영화배우 출신 박씨와의 스캔들이었습니다. 이맹희와 박 씨와의 첫 만남은 서울 남산에 위치해 있는 고급 사교장에서 이뤄졌다고 합니다. 당시 20세였던 박 씨는 이맹희가 이병철 회장의 장남이며, 자식까지 있는 유부남인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도 만남을 지속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했고 1963년에는 혼외자인 이재휘를 낳게 됩니다. 이병철 회장은 이 사실을 알고 대로했다고 합니다. 그로 인해서 박 씨와 이맹희는 헤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혼외자인 이재휘를 손자로 인정할 수 없다고도 했다고 합니다. 

 

20년이 지난 후, 이맹희와 박씨모자는 부산에서 만남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때 이맹희는 아들인 이재휘에게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지갑, 금장 버클, 볼펜, 시계 등을 선물로 줬다고 합니다. 이맹희는 박 씨에게 아들의 학비도 지원하겠다고 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이 약속은 지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마지막 만남 후 20년이 지난 2004년에 이재휘 씨는 친자확인 소송을 제기했으며, 2006년 10월 대법원으로부터 친자확정 판결을 받게 됩니다. 친자확정을 판결받고 난 후 재산상속에 대한 소송을 걸게 되지만, 패소하게 됩니다. 

 

폐암 수술 이후 베이징에서 사망하다.

2015년 8월 14일 베이징에서 사망하게 됩니다. 2012년 12월 폐암 2기 진단을 받고 폐의 3분의 1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듬해 암이 부신 등으로 전이돼 일본과 중국 등을 오가며 방사선 치료를 받았으며, 최근에는 중국 베이징에서 머물며 투병생활을 해왔습니다. 삼성 창업주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화려한 젊은 시절을 보냈지만, 아버지와 완전히 절연하게 되면서 외로운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인 이병철 회장도 폐암과 위암 수술 후 후유증으로 인하여 사망했으며,  동생인 이건희 회장도 폐암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투병을 하다 사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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