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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으면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조선왕실의 여인 - 조선 왕실 로맨스 '의빈 성씨'

by yesssi1990 2023.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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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보다 나이 많은 관료들에게도 막말이나 욕설을 스스럼없이 내뱉던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던 정조대왕이 유일하게 순한 양이 되어서 사랑을 갈구한 여인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들에게도 유명한 의빈 성씨입니다. 정조대왕과 의빈성씨의 사랑이야기는 드라마로 많이 다뤄져서 우리에게도 익숙합니다. 정조대왕이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인 의빈 성씨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드라마 옷소매붉은끝동

 

 

<목차>

1. 어린나이에 궁궐로 입궁하다.

2. 철벽녀 '의빈성씨'

3. 정조와 의빈의 첫 아이를 출산하다.

4. 자식을 잃은 슬픔, 견뎌내지 못하다.

4. 세상을 떠난 의빈, 그리고 남겨진 정조의 슬픔 

 

1.  궁녀로 입궁하다.

본관은 창녕이며, 이름은 덕임으로 1753년(영조 29년) 음력 7월 8일에 증찬성 성윤우와 정경부인 부안 임 씨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덕임의 아버지인 성윤우는 본래는 홍봉한(혜경궁 홍 씨의 아버지이자 정조의 외할아버지)의 집안의 청지기(주인(소유권자)이 맡긴 것들을 주인의 뜻대로 관리하는 위탁관리인)였습니다. 신분은 낮았으며 집안은 가난해서 늦은 나이에 무관에 합격하여서 무관으로서 벼슬을 지냈습니다.

붉은소매 끝동

이후에 의빈 성씨는 아버지인 성윤우가 나라에 바칠 7000냥을 써버리는 바람에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그로 인해서 집안은 망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내용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에는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후에 의빈은 홍봉한의 가문과의 인연으로 인하여 혜경궁 홍 씨가 의빈 성씨를 거두어 곁에 두고 직접 길렀다고 합니다. 의빈이 입궁하기 전에 어머니인(정경부인 부안 임 씨)는 사망했으며, 성윤우는 지병으로 인해서 투병 중이었다고 합니다. 이미 가세가 많이 기울어진 상태로 추정됩니다. 조선 왕실의 여인들은 자식이 없을 경우에는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궁녀를 양녀처럼 키웠던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혜경궁 홍 씨에게는 이미 3명(정조, 청연공주, 청선공주)의 자식들이 있었으나 정조는 혜경궁이 머무는 창덕궁이 아닌 경희궁에 있었으며, 두 공주는 하가(결혼)해서 혜경궁을 자주 만나러 오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에 반해서 의빈은 혜경궁 처소의 궁녀로서 혜경궁 곁에 늘 있을 수 있었고 본인의 자식들과 비슷한 나이대에 의빈을 혜경궁의 자식처럼 키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의빈 성씨는 신분이 중인이었으며 혜경궁이 사실상 수양딸처럼 키운 것으로 보아서 고위 부서의 생각시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2.  정조를 몇 번이건 거절한 철벽녀 의빈성씨 

정조는 세자빈 시절에 덕임에게 승은일 내리려고 하자 의빈은 울면서 "세손빈(효의왕후)이 아직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하여 감히 승은을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죽음을 맹세하고 명을 따르지 않겠다고 해서, 정조는 덕임의 뜻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덕임도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 시절 왕족의 명령, 더군다나 미래의 왕이 될 세자빈의 명을 거절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사실은 덕임은 정조가 본인을 사랑하는 것을 알아서 배짱을 부릴 수 있었던 걸까요?

 

1779년 (정조 3년)에 첫 번째 간택 후궁이었던 원빈 홍 씨(홍국영의 여동생)가 사망하고 1780년(정조 4년) 조정에서 화빈 윤 씨를 간택하고자 했을 때 정조는 새 후궁을 들이는 것을 꺼려했다가, 결국에는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정조의 자식이 한 명도 없는 상태에서 당시 중전이던 효빈왕후한테서도 자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후궁을 맞이하고 나서 1년이 지난 후에 정조는 덕임에게 다시 한번 승은을 내렸지만 덕임은 또다시 거절하게 됩니다. 덕임의 의지도 대단하지만, 정조도 이번에는 뜻을 굽히지 않게 됩니다. 정조는 덕임의 하인들을 괴롭히고 갈구며 벌을 내렸다고 합니다. 이에 덕임은 뜻을 굽히여 정조의 승은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정조는 백성들을 생각하는 능력 있는 왕이었지만 자신의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는 한 없이 어린애 같아지는 구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3.  의빈성씨 아들을 출산하다. 

덕임은 정조의 승은을 지속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중전이던 효의왕후에게 자식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승은을 입은 본인이 아이를 낳게 된다면 그녀가 힘들 것이라고 생각해서 배려한 이유도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본인이 승은을 입는 것은 분수에 넘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조의 끈질긴 구애 끝에 결국에는 승은을 받아 들이게 됩니다.

 

덕임은 1782년 8월 특별상궁 직첩을 받아 정 5품 상의가 됩니다. 승은을 입어 정조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던 덕임인 상의가 된 지 한 달 후인 창덕궁에서 왕자를 낳게 됩니다. 당시에 덕임을 딸처럼 키운 혜경궁 홍 씨는 친정에서 유모와 여종을 궁으로 데리고 와서 덕임의 해산을 직접 돕도록 지시했다고 합니다. 당시 정조의 후계자가 없던 상황에서 왕자의 탄생은 온 조정이 떠들썩할 정도로 큰 경사였습니다. 정조도 너무 기쁜 나머지 덕임을 정 3품 소용으로 삼게 됩니다. 또한 정조는 " 드디어 아비라는 호칭을 듣게 되었으니 참으로 다행스럽고 많은 일중에 이보다 기쁜 일은 없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덕임에게서 낳은 자식인데, 더군다나 당시 후계자를 포함해서 자식이 없었던 정조에게는 큰 선물이었습니다. 

 

정조는 왕자가 태어난 지 100일도 안 되어서 왕자를 원자로 책봉했으며, 이듬해에는 덕임을 정1품 의빈으로 봉하게 됩니다. 참고로 정1품은 영의정/우의정과 같은 품계입니다. 내명부에서는 중전 다음으로 높은 품계의 후궁입니다. 의빈에 대한 정조의 총애는 날이 갈수록 깊어지게 됩니다. 이는 곧 왕실에서 또 한 번의 경사스러운 일이 됩니다. 바로 의빈이 옹주를 출산하게 된 것입니다. 이에 정조는 "아들이 있는 데다가 딸까지 생겼으니 참으로 기쁘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4.  자식을 잃은 슬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세상을 등지다.

하지만, 정조와 의빈의 행복한 날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게 됩니다. 옹주가 태어난 지 2개월 만에 경기를 일으켜서 피접을 나간 곳에서 5월 12일에 사망하게 됩니다. 이때 의빈성씨와 정조뿐만 아니라 혜경궁 홍 씨도 손녀의 죽음을 엄청나게 슬퍼했다고 합니다. 정조 또한 딸을 잃은 슬픔에 비통함을 감출 수 없었으며, 다음 날인 13일에 모든 정사를 돌보지 않고 슬퍼했다고만 합니다.

 

그렇게 하나뿐인 딸을 보내고 난 후 2개월 후에 왕자는 세자로 책봉되어서 문효세자가 됩니다. 그러나 2년 후에 홍역에 걸리게 됩니다. 당시 조선 최고의 의관들이 문효세자를 정성껏 돌보아서 잠시 증세가 호전되기도 했지만 결국 증세가 악화되어서 어린 세자마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자신보다 더 소중한 자식을 둘이나 잃은 의빈은 세상이 무너지는 슬픔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알 수 없는 중병에 걸려서 앓아눕게 됩니다. 그렇게 의빈은 궁이 아닌 다른 곳으로 피접을 나갔다가 증상이 좋아지자 다시 궁으로 들어왔고 정조의 지극정성 보살핌을 받게 됩니다.

 

 의빈인 본래 성격이 마음이 여리고 약해서 마음의 병 증세가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 현대로 치면 우울증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효세자가 사망하자 곧 중병에 걸렸고 본궁으로 피접을 떠났다가 건강이 나아지자 다시 창덕궁으로 돌아옵니다. 창덕궁으로 돌아온 의빈을 정조는 극진하게 보살피지만, 몸과 마음이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는 상태에서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되면서 1786년 머물고 있던 창덕궁에서 임신 9개월의 몸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정조가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당시의 의학 수준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임신중독증으로 사망을 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의빈성씨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정조에게 남긴 말을 "어서 후사를 이으셔야 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죽어가는 순간에도 정조의 후사에 대해서 걱정을 한 의빈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조와 의빈은 정말 진실 되게 사랑한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효의왕후는 의빈이 죽었을 때 친자매가 죽은 것처럼 통곡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 동갑내기에 입궁시기도 같아서 친분이 깊었다고 합니다. 

 

5.  첫사랑이자 마지막사랑 의빈을 떠나보낸, 정조 슬픔에 빠지다.

정조는 의빈성씨의 3년 상을 마친 후, 직접 제문(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글)을 내리게 됩니다. 왕이 후궁에게 묘비명을 내려주는 일은 조선역사에서 거의 없던 일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정조는 의빈의 제사마다 제문을 직접 내리게 됩니다. 형식적으로 내리는 글이 아닌 의빈을 그리워하는 절절한 마음을 담은 글을 써서 내립니다.  의빈은 사후에도 왕을 낳은 후궁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고 합니다. 문효세자를 낳았지만, 문효세자는 왕이 되지는 못했지만 정조는 의빈을 사후에도 극진하게 대우합니다.

 

의빈의 남편 정조대왕의 관련한 포스팅 내용입니다.

 

조선의 역사 - 성군이었지만 더러운 성격의 소유자였던 '정조대왕'

백성을 사랑한 성군 '정조' 정조대왕은 세종대왕, 영조대왕과 함께 조선의 태평성대를 이끈 성군이라고 평가받고 있는 왕입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할아버지인 영조가 내린 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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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의빈이 죽기 전에 후사를 이으셔야 한다는 말을 남겼는데, 정조는 순조가 태어나자 의빈에게 왕통이 이어졌다며 글을 내리게 됩니다. 이런 것을 보면 정조는 의빈을 진심을 다해서 사랑한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랑을 하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래의 정조가 의빈성씨에게 내린 제문의 내용을 다시 읽지만, 눈물이 나올 정도로 슬펐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사람의 애절한 마음에 감정이입이 되었습니다. 

 

아, 너의 근본이 굳세어서 갖추고 이루어 빈궁이 되었거늘 어찌하여 죽어서 삶을 마치느냐. 지금 이 상황이 참으로 슬프고 애통하고 불쌍하구나. 평상시 화목하게 지냈건만 네가 나를 떠나 죽고 말았으니 너무 애달프고 슬프다. 네가 다시 살아나서 이승으로 살아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이 한 가지 그리움이 닿아서 네가 굳세게 이룬다면 네가다시 이승으로 돌아와서 궁으로 올 것이다. 이렇게 상상하면 매우 마음이 아프다. 너는 문효세자의 어머니다. 네가 임신해서 낳은 아이가 문효세자이며 나의 후계자다 세자는 이미 두 살 때 글을 깨우쳤다. 너의 근본이 단단해서 임신을 했는데 낳지 못하고 죽었다. 죽은 문효세자가 셋째가 되어 다시 우리 곁으로 올 줄 알았건만 하늘과 땅은 우리 사이를 더 떨어트려 놓았다.

그래서 마음 한가운데가 참 슬프고, 애가 타며 칼로 베는 것처럼 아프다. 사랑한다. 참으로 속이 탄다. 네가 죽고 나서 나와 헤어졌다. 나는 비로소 너의 죽음을 깨달았다. 너는 멀리 떠났다. 나는 무릇 지나고 나서 깨달았다. 너를 데려올 방법이 없고 다른 사람을 보내 물리칠 방법도 없다. 참 슬프고 애달프다. 앞전에 겪은 일과 비교해도 비교할 게 없을 만큼 슬프다. 나는 저승도 갈 수 없다. 너를 생각하면 애통하고 슬프도다. 너는 진짜 이승을 떠나는구나. 사랑하는 너는 어질고, 아는 바가 많고, 총명하고, 슬기롭고 밝고, 이치를 훤히 알고 옳고, 예절을 지키는 사람이다.

어찌 그 재주와 얼굴을 잊지 아니하겠는가 빈의 흔적은 장차 이 세상에서 아주 사라질 것이다. 이 뛰어난 언행을 내가 글로 적지 않는다면 누가 그것을 전하고 알려서 아주 사라지는 것이 애석하다고 하겠는가 너는 문효세자를 잃었을 때 쉬지도 못했고, 눈물도 그치지 못했다. 나는 너의 뱃속에 있는 아기를 위해서 문효세자의 죽음을 슬퍼하는 네가 잘못될까 봐 걱정돼서 돌려보냈다. 그런데 너의 목숨은 어찌 이리 가느다랗단 말이냐 편히 쉬어라 세자를 너의 옆에 있게 할 것이다.

지금 내가 너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구나. 살아 있는 나와 죽은 네가 끝없이 오랜 세월 동안 영원히 이별하니 나는 못 견딜 정도로 근심과 걱정이 많다. 나는 이제까지도 네가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확정 짓지 못하고 있다. 슬프소 슬픈 사람의 마음은 메어있지 않은 것 같구나.

-정조가 의빈성씨에게 보낸 제문(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글)

의빈, 독살 당하다?

의빈성씨의 죽임에는 독살당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는 의빈성씨와 문효세자가 처음부터 나타는 병의 증세가 이상했다면서 이는 은언군(정조의 이복동생)이 본인의 아들은 상계군을 왕으로 세우려고 독살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의빈과 문효세자의 죽음에 대한 정확한 진상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식음을 전폐하겠다는 교지를 내렸습니다. 이후에 구선복이라는 자가 상계군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던 사실이 드러나면서 구선복은 능지처참되고 은언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습니다. 은언군도 나중에 한번 다뤄보고 싶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왕족으로 태어났지만 불행한 인생을 살다 간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손용득이라는 자가 이윤묵이라는 내관이 의빈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면서 정조한테 고하게 됩니다. 하지만, 정조는 의빈의 약을 조제할 당시에는 반드시 본인이 직접 확인을 했기 때문에 근거가 없는 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손용득은 유배형을 받았으며, 내관 이윤묵도 당시에 이미 유배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한테 들렸던 소문은 화빈윤 씨가 의빈성씨를 매우 미워하여서 독을 써서 죽였다는 소문도돌 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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