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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으면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고려 왕실의 역사 -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는 세기의 사랑의 주인공 <노국대장 공주>

by yesssi1990 2023.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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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국대장공주, 그녀는 고려의 제31대 임금인 공민왕의 제1 비입니다. 원나라 출신의 마지막 황후이며 국가를 통치하는 왕의 이민족(외국에서 온) 최후의 왕후입니다. 둘의 사랑은 여러 매체에서 다뤄졌으며, 그로 인해서 한국인들은 거의 다 알고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나라의 왕녀였지만 고려와 고려인을 사랑했던 몽골인 왕후이고 공민왕과의 애달프고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는 사랑으로 유명한 인물인 노국대장공주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목차>

1. 원나라의 황실의 공주

2. 볼모로 잡혀온 고려의 왕자 강릉대군과 혼인하다.

3. 노국대장공주, 공민왕의 든든한 정치적 동반자가 되어주다.

4. 금슬은 좋았지만, 후사가 생기지 않다.

5. 노국대장공주의 죽음

 

1.  원나라 황실의 공주로 태어나다.

노국대장공주는 공민왕과 결혼하기 전의 기록은 남겨진 것이 매우 적습니다. 언제 태어났으며, 어떻게 살았는지 정확하게 남겨진 기록이 없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위왕 아무케는 원 세조 쿠빌라이 칸의 손자이자 칭김 황태자의 차남이었던 다르마발라가 장성하자 원 세조가 자신의 궁인이었던 곽 씨를 그에게 내주었습니다. 그러한 곽 씨가 다르마발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입니다. 위왕 아무케의 장난 아루는 지순 원년에 '서정왕'에 봉해졌으며, 나아가 서쪽의 섬서를 지켰다고 합니다. 그래서 차남인 베이르테무르가 아버지 아무케의 위왕 작위를 물려받았으며, 위왕 아무케는 제3대 원 무종 카이산 칸과 제4대 원 인종 아유르바르다 칸의 이복형인데, 중국의 역사서 '원사'에 의하면 노국대장공주는 아무케보다는 위왕 자리를 이어받은 차남인 위왕 베이르테무르의 딸이라고 젹혀져 있다고 합니다.  

 

2.  볼모로 잡혀 온 고려의 왕자 강릉대군과 혼인을 하다.

노국대장공주는 1329년(제30대 충정왕 1년)에 충숙왕(제27대)의 삼남인 강릉대군(공민왕이 왕으로 즉위하기전 칭호) 왕전과 혼인했습니다. 노국대장공주는 처음에 고려로 올 때는 '승의공주'로 책봉되었습니다. 사실 원나라의 위왕 베이르테무르의 왕녀 노국대장공주는 남편 공민왕과는 9촌입니다. 공민왕도 세조 쿠빌라이 칸의 현손(4대손)이었으며, 노국대장공주는 쿠빌라이 칸의 내손(5대손)이었지만, 충숙왕의 제2 비 조국장공주(공민왕의 의붓어머니)가 노국대장공주의 고모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은 사촌끼리 결혼한 셈이 됩니다. 당시 고려의 왕족은 공민왕의 증조할아버지인 제25대 충렬왕 때부터 몇 번이나 족외혼(다른 집단과의 혼인)이 이루어지면서 원나라 황실의 방계이기도 했습니다.

 

남편인 강릉대군은 혼인 조건이 좋은 상대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맏형인 충혜왕(제28대) 2년 12세의 어린 나이에 충혜왕의 친동생으로서 원나라로 가게 됩니다. 원나라에서 '대원자'로 불리우며 후계자로 주목받았습니다. 부왕인 충숙왕이 윤택에게 강릉대군을 부탁한 것을 볼 때, 충혜왕 이후 왕위 계승자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최악의 폭군이었던 맏형인 충혜왕이 중국 남쪽 변방으로 유배되어 가던 도중에 죽게 되고, 조카인 충목왕이 8세라는 어린 나이에 제29대 군주가 되게 됩니다. 하지만 충목왕은 12세의 어린 나이에 죽게 되었고 강릉대군의 또 다른 조카였던, 충목왕의 이복동생 충정왕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어린 조카에게 밀려서 왕이 되지 못했습니다. 두 번이나 어린 조카에 밀려난 강릉대군은 충정왕이 죽지 않는 이상에는 임금이 되기 어려워 보였습니다. 위왕의 왕녀인 노국대장공주와의 결혼은 강릉대군에게 있어서는 차기 왕위 계승에서 자격을 얻기 위한 정략결혼이었습니다. 실제로 이들이 결혼하고 나서 2년이 지난 뒤 원나라의 혜종이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강릉대군 왕전이 왕위에 오르게 되면 고려의 31대 왕 공민왕이 되고, 승의공주는 고려의 왕비가 되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 덕에 고려의 왕이 된 것으로 보이지만, 공주의 친정인 위왕의 쇠락한 상황으로 봤을 때는 원 황실내에서 대단한 세력은 아니었습니다. 고려의 왕이 될 수 있도록 어느정도 영향은 끼쳤을겁니다. 하지만 노국대장공주와의 결혼은 정략결혼도 있지만 강릉대군은 어린 시절부터 원나라에 머물렀고 이 때문에 만남을 가졌던 여러 황족 여성들 중에서 자신과 가장 잘 맞을 만한 사람과 결혼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의 계비였던 조국장공주가 노국대장공주의 고모였으므로 그것도 큰 이유가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3. 노국대장공주, 공민왕의 든든한 정치적 동반자가 되어주다.

공민왕과 결혼 후 고려에서 살게 된 노국대장공주는 원나라의 왕녀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민왕의 개혁정치나 반원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습니다. 그녀는 공민왕의 정치적 동반자였으며 고려의 백성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특히나 흥왕사의 변 (김용이 공민왕을 죽이기 위해 궁으로 침입한 사건) 공민왕이 숨은 방 앞에 앉아 반란군을 가로막은 걸로도 유명합니다. 비록 원나라 황실 내에서 세력이 미약했으나, 그녀는 엄연히 원나라 황실의 공주 신분이었기 때문에 원나라를 등에 업고 있던 부원배와 반 공민왕 세력들도 서열상 본인들보다 높았으며 명분과 권위도 가지고 있던 그녀가 전면에 나섰을 때는 반발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노국대장공주

노국대장공주 본인은 정치 일선에서 나서지도 않았지만 위에서 말한 그녀의 입지로 인해서 존재 자체만으로도 공민왕의 든든한 정치적 뒷배경이 되어 주었으며 본인도 이런 자신의 지위를 남편의 개혁정책을 위해 적극 이용했습니다. 이러한 공주의 역할은 공민왕은 물론 고려의 신하들도 모두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원나라를 철저하게 오랑캐 취급하던 조선의 개국세력인 신진사대부들조차 고려의 완전한 독립과 개혁을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해 노력했던 그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이유 때문인지 조선 종묘에 있는 공민왕의 사당에는 신진사대부들이 오랑캐 취급했던 원나라의 왕녀였던 노국대장공주가 사당에 같이 모셔져 있습니다.

 

 

아래의 포스팅은 노국대장공주의 남편인 공민왕에 대한 포스팅입니다.

 

고려의 역사 - 고려 말 위대한 개혁 군주였지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고려의 제 31대 왕 <

공민왕(재위: 1351~1374년)은 고려 왕조의 가장 중요한 통치자 중 한 명입니다. 공민왕은 원나라(몽골)의 고려에 대한 간섭 및 지배를 끝내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한 개혁군주입니다. 공민왕의 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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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노국대장공주가 모른 척했거나 원나라를 등에 업고 있던 유력 권문세족들의 편을 들어줬다면 공민왕의 반원 개혁정책은 실시하기가 굉장히 어려웠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국대장공주가 공민왕의 편을 들어주고 본인이 할 수 있는 한 공민왕의 방패막이가 되어줬습니다. 노국대장고주는 공민왕에게 정치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의지가 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녀는 고려가 어려울 때는 몸을 바쳐 도와주었으면서도 불구하고 다른 공주들처럼 권력을 행사하거나 청탁 등을 절대 들어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고려의 귀족들과 다른 시련들로 인하여 힘들었던 고려의 백성들이 노국대장공주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4.  금슬은 좋았지만, 후사가 생기지 않다. 

이러한 노국대장공주의 내조 덕분에 공민왕의 그녀를 향한 사랑은 대단했습니다. 왕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여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둘이서 금슬이 굉장히 좋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좋았던 금슬에 비해서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결혼 10년 만에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중신이었던 이제헌의 딸 이씨를 비로 들였습니다. 바로 혜비 이 씨입니다.  사실 공민왕은 후궁을 들이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후사가 없던 공민왕이었기 때문에 고려의 신료들과 어머니인 명덕태후 홍 씨는 간절하게 간청을 하였으며, 공민왕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후궁을 들일 때는 노국대장공주의 허락까지 맡고 들였다고 합니다. 들이고 나서는 노국대장공주가 투기로 인해서 식음을 전폐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하지만 투기라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남편이 다른 여자를 두 번째 아내로 들인다고 하는데 힘들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공민왕은 후사 문제로 인하여 혜비 이 씨를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얻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노국대장공주만 바라본 공민왕의 사랑으로 인했던 것 같습니다. 당연히 신하들은 후사를 보기 위해서 다른 후궁을 들여야 한다고 간청했지만,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가 승하하기 전까지는 후궁을 들이지 않았습니다.

 

5.  난산으로 인한 공주의 죽음, 그리고 고려을 비추던 마지막 등불도 꺼지게 되다. 

노국대장공주 난산을 겪다가 죽음에 이르다.

고려사에 따르면 공주의 시중이자 몽골인 내관이 최원이라는 자에게 구타당하는 장면을 보고 유산을 겪은 적이 있다고 적혀져 있습니다. 유산 이후에는 오랫동안 임신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에 드디어 아이를 가지게 되었지만 아이를 가진 다음 해에 난산으로 인해 상하 하게 됩니다. 공민왕은 그녀의 순산을 얼마나 절실하게 바랬는지 사형수를 제외하고 나머지 죄수들을 사면했으며, 공주가 위독해지자 고려의 산천과 사찰에 기도를 드리도록 했으며, 나중에는 사형수까지 모두 사면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노국대장공주는 승하했으며 태중에 있던 아이까지도 세상을 뜨게 됩니다. 그녀가 죽인 이후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 생전에 들인 혜비 이 씨를 제외하고 익비 한 씨, 정비 안 씨, 신비 염 씨 등을 후계자 문제로 인하여 들였지만 이들도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들 중 혜비 이 씨는 공민왕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하고 불행한 시절을 보내다가 공민왕 사후에는 출궁 하여서 비구니가 되었다고 합니다.

 

반야(신돈의 첩)가 공민왕이 신돈의 집에 왔을 때 모시게 되었고, 공민왕의 유일한 자식인 우왕을 낳게 됩니다. 반야가 공민왕의 자식인 우왕을 낳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노국대장공주의 외모와 많이 닮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나마 자식을 낳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반야가 노국대장공주와 닮은 외모였기 때문이라니, 정말 공민왕의 순애보는 애절한 것 같습니다. 노국대장공주 사후에 공민왕이 반야에게서 우왕을 낳은 것을 보면 공민왕에게 문제가 있던 게 아니라 노국대장공주가 난임이었던 것 같습니다. 

 

노국대장공주

노국대장공주의 죽음 그 이후

노국대장공주가 죽은 후,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공민왕은 방 안에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황을 걸어 놓고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공주가 살아 있을 적과 다름 없이 그녀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으로 인해 크게 상심한 공민왕은 그녀의 죽음 이후 정치에 뜻을 잃었으며, 고려 왕조의 운명도 그날부터 사실상 마지막을 고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고려는 망하게 되고 조선이 건국되기 때문입니다.  

 

노국대장공주가 죽었을 때 공민왕의 나이는 고작 36세 였습니다.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은 여러 가지 개혁을 시도하던 공민왕에게 좌절을 안겨주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는 공민왕의 노국대장공주에 대한 순애보뿐만이 아니라 당시 고려 내에 정치적인 면에서도 권문세족의 반발을 누르고 있었던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은 공민왕이 시도한 개혁정책의 힘을 크게 약화됨을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은 다른 왕조의 왕실 여인들의 죽음과는 다르게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언급될 정도로 고려의 정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역사 교과서에까지 서술될 만큼 절절한 역사 속의 로맨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국대장공주의 능은 경기도 개풍군 중서면 여릉리( 황해도 개풍)에 위치해 있습니다.  장례는 제국대장공주의 예에 따라 진행되어서 4월 임자일에 '정릉'에 장례를 지냈다고 합니다. 공민왕은 자신이 죽으면 노국공주의 곁에 묻히고 싶어 했다고 합니다. 죽어서는 공민왕과 노국공주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승에서 못다 이룬 사랑을 모두 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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