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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으면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정주영의 여자들 - 범 현대가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정주영 회장의 아내 <변중석>

by yesssi1990 2023.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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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중석 그녀는 범 현대가 일원들의 정신적 지주였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범 현대가 내에서 부인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녀들은 물론, 정주영의 동생들 마저 그녀를 어머니처럼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변중석도 삼성 이병철 아내인 박두을처럼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극히 드물었지만, 성품이 푸덕하면서도 검소하고 사람이 좋다는 평이 많았다고 합니다.  정주영의 인생의 동반자 변중석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목차>

1. 15세 꽃다운 소녀 얼굴 한 번도 보지 못한 남자와 결혼을 하다.

2. 결혼 후, 정든 고향을 떠나 서울로 상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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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세에 꽃다운 소녀 얼굴 한 번도 보지 못한 남자와 결혼을 하다.

변중석은 1921년 8월 16일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옥마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농사를 짓는 아버지 밑에서 7남매 중 맏딸로 태어난 변중석은 그 시절의 어느 여자아이들처럼 여자라는 이유로 보통학교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서당과 교회 야학 등을 통해서 한문과 언문을 깨우쳤다고 합니다. 변중석의 집은 정주영의 집과 약 2km  정도 떨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결혼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는 만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정주영 부인

변중석과 정주영을 이어준 사람은 변중석 친정과 한 동네에서 살았던 정주영 회장의 넷째 숙부였습니다. 동네에서도 유명했던 성품이 곱고 후덕한 변중석을 어릴 때부터 눈여겨보았다가, 자신의 조카인 정주영이 결혼적령기에 이르자 맞선을 주선하게 됩니다. 두 사람은 1935년 11월 23일 밤 변중석의 집에서 처음 대면하게 됩니다. 당시 15세의 소녀 변중석은 윗마을 총각이 서울서 선을 보러 내려왔다는 아버지의 말에 방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떨고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로 치면 중2의 소녀가 한 번도 보지 못한 21세의 청년이랑 결혼하려고 하니 무서웠던 것 같습니다. 변중석은 무서워서 숨을 죽인 채 이불을 덮고 있었는데, 갑자기 낯선 총각의 굵은 목소리가 들리더니 본인이 있던 방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고 합니다. 들어온 총각은 놀라서 이불로 몸을 감춘 소녀를 힐끗 보더니 말 한마디 없이 방을 나가버렸다고 합니다. 이게 변중석과 정주영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이 만남은 변중석과 정주영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달 뒤에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신랑은 신부의 뒷모습만 보고, 신부는 신랑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이뤄진 결혼이었습니다.

 

사실 변중석의 어머니의 극심한 반대가 있었다고 합니다. 딸이 나이가 어리다는 것을 들어서 반대했지만, 정주영 회자으이 집안이 너무나 좋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고 합니다. 당시 21세의 청년 정주영은 서울에서 쌀가게에서 배달 일을 하는 점원으로 일하고 있었고, 집안도 많이 가난했으며 정주영 밑으로 줄줄이 딸린 동생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친정어머니로서는 딸이 시집가면 얼마나 고생을 할지 눈에 훤히 보였기 때문에 반대를 했다고 합니다. 변중석 집안도 넉넉한 것은 아니었지만, 정주영 집안에 비하면 유복한 편이었다고 합니다. 반대하던 어머니가 마음을 돌리게 된 이유는 변중석의 큰 오빠가 정주영의 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정주영보다 한 살 위였으면서 보통학교 선배였는데, 어머니한테 정주영은 믿을만한 사람이며 동생의 남편 감으로서 믿을만한 사람이라면서 설득했다고 합니다. 

 

2. 결혼 후, 정든 고향을 떠나 서울로 상경하다. 

변중석은 결혼식을 올리고 난 후에 남편인 정주영을 따라서 서울로 오게 됩니다. 그 이후로 친정식구들을 죽을 때까지 보지 못하게 됩니다. 시집 간 후 친정은 강원도 통천에서 함경북도 청진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이후에 6.25 전쟁 발발하고 분단이 되면서 소식이 완전히 끊기게 돼버린 것입니다.  정주영은 생전에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해방 전인 일제 때라도 아내를 친정에 보내주지 그랬냐?"는 질문에 "허허, 그래 내가 못 가게 했지. 돈 벌어  가자고 밤낮 얼렀는데 지금 생각하니 너무 미안하구먼"이라고 했는데,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변중석은 "아니에요. 친정 안 보내준다고 야속하게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당신도 이때껏 고향을 못 가보았잖아요"라고 답했습니다. 변중석은 정말 대단한 사람 같습니다. 저라고 한다면 친정 한 번을 안 보내준 남편이 너무나도 미웠을 겁니다. 하지만, 변중석은 남편을 미워하기는커녕 당신도 고향을 못 가보지 않았냐며 괜찮다고 말하는 살아 있는 부처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3.  불같은 성격의 남편 대신에 가족을 따뜻하게 보듬어 주다.

정주영은 생전에 불같은 성격으로 유명했습니다. 부하 직원들 다스리는 방식도 굉장히 혹독했으며, 본인의 자녀라고 예외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자녀들도 정주영을 부르는 호칭도 '아버지'나 '아빠'가 아니라 '회장님'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이러한 남편과 사는 변중석은 늘 조마조마 했다고 합니다. 생전 인터뷰에서 했던 내용을 보면 "아이들도 아버지가 무서우니까 무척 어려워했어요. 자나 깨나 조심조심이었죠. 묻는 말씀에나 대답할까.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항상 나를 통해서 얘기했지요. 아이들을 감싸고도는 것이야 말로 내가 집에서 해야 할 큰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기자는 또 다른 질문을 하게 됩니다. "자식들 키울 때 속상한 일이 없었느냐"고 묻자 변중석은 "속을 썩여도 욕 한마디 안 하고 지냈다. 원래 내가 속상할 때는 말을 안 한다. 속상한 일이 있어도 젖을 물리고 애와 함께 울었으면 울었지 누구한테 말을 안 했다. 오죽하면 시집와서 회장님이 벙어리를 데리고 왔다 했을까"라고 답했습니다. 변중석은 "살아오는 동안 아이들 기를 때가 가장 어려웠다. 여럿이다 보니 별 놈 다 있잖은가. 회장님은 늦게 귀가하니까 집안 돌아가는 사정은 하나도 몰랐다. 그래서 내 책임이 무거웠다. 회장님이 애들 야단칠 때는 내가 야단을 맞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모두 내 잘못인 것 같았다."라고 답을 했습니다.  

정주영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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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중석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보다 아랫사람도, 어려운 이웃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죽하면 무뚝뚝한 성격의 정주영은 항상 아내를 존경한다고 말했습니다. 가끔 임원 가족들과 한자리에 어울려 놀 때는 느닷없이 임원들에게 변중석에게 절을 하라고 시키고는 정주영 본인이 솔선수범해 절을 했다고 합니다. 불같은 성격에 회장님이 임원들 가족들이 있는 앞에서 아내한테 먼저 절을 한다는 것은, 무뚝뚝하면서도, 수많은 여자들과 염문설을 뿌리며 바람을 피워온 정주영이 유일하게 존경하였으며, 자신을 거쳐간 여자들 중에 유일하게 아내로 인정한 변중석에 할 수 있는 최고의 애정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겸손하며 후덕한 변중석,  대한민국 최고 그룹 회장의 아내이지만 검소한 생활을 이어나가다.

변중석은 검소했지만, 사람들에게 인색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변중석은 끼니를 걱정하던 시절에서 집에 찾아온 거지를 그냥 돌려보내는 법이 없었다고 합니다. 마음이 약해서 물건 값도 깍지도 못했으며, 부산 피난 시절에는 거리에서 포도장사를 한 적이 있는데 손님이 달라는 대로 다 주다보니 이익은커녕 밑지는 날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정이 많았던 변중석은 1년에 각 한번씩 설과 추석 전후로 며느리들을 모두 데리고서 고아원을 방문하는 일을 빼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고아원에 방문 시 선물이나 기부금을 빼놓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돈도 남편이 준 돈이 아니라 본인이 생활비를 줄여서 저축한 것을 기부했다고 합니다. 고아원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당시 최고의 그룹이었던 현대가의 안주인임을 드러내지 않고 봉사 활동을 하다가 갔다고 합니다. 남편인 정주영이 신설동에 자동차 수리공장을 지으면서 집도 이곳으로 옮겨가자 밤샘으로 일하는 공장직원들의 밤참을 직접 해서 먹였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현대가 규모가 커지자 직원식당의 주방장 역할을 직접 자처하며 구내식당을 책임졌다고 합니다. 

 

변중석은 남편이 하는 일에는 간섭 자체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남편이 알아서 일을 잘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본인의 역할은 남편이 집안일에 일절 신경 쓰지 않도록 도와준 것 밖에는 달리 한 일이 없다고 생각했으며, 일을 마치고 들어온 남편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 아내의 본분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정주영이 여러 여자들과 바람을 많이 피운다는 소문을 들어도 그저 웃기만 했다고 합니다. 이 부분에서는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습니다. 남편이 다른 여자들과 바람을 피우며 밖에서 낳아온 자식들을 변중석에게 "내 핏줄이니 키워라" 이 한마디만 하고 아이를 주면 "네"라는 말 한마디만 하고 본인이 낳은 자식처럼 키웠다고 합니다.  속안에 부처님이 앉아 있는 것 같은 변중석이었습니다.

 

5. 자식들의 연이은 죽음, 버틸 수 없었다.

변중석 장례식

 

변중석은 평소에 굉장히 건강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장남인 정몽필이 1982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 충격으로 건강을 잃고 말았다고 합니다. 1990년에는 4남인 정몽우마저 자살로 생을 마치자 버틸 힘을 완전히 잃어버렸는지 병원에 입원해 임종할 때까지 16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5남 정몽헌 마저 2003년 대북사업과 관련하여 조사를 받던 중 현대그룹 본사 사옥에서 자살했습니다. 변중석은 자식을 3명이나 먼저 보낸 불행한 어머니였습니다. 생전에 기고한 글에서 "우리 부부에게 가장 큰 슬픔은 두 아들과 큰며느리를 먼저 보내야 했던 일이다. 그때마다 그분(정 회장)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인과응보야. 결국 돈은 인간의 목적도 행복도 아니야'하며 침통해했다"라고 적었습니다. 변중석은 입원 초기에는 간간이 바깥나들이도 했으나 점점 의식이 희미해져 고혈압에 뇌세포 파괴에 따른 운동장애는 물론 기억력 상실을 앓았다고 합니다. 말년에는 거의 의식이 없어 2001년 남편 정주영과 2003년 아들 정몽헌의 사망 사실도 몰랐다고 합니다. 변중석은 2007년 8월 17일 향년 86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습니다. 변중석은 남편 정주영이 묻힌 경기도 하남시 창우동 선영에 함께 묻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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