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열사는 일제 강점기 시대의 독립운동가이며, 10대의 어린 나이에
나라의 독립을 위해 본인의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사의 여성영웅입니다.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사의 지대한 영향을 끼친 유관순 열사를 절도범이라고 모독한
3.1절에 일장기를 건 세종시의 한 부부 때문에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본인들이 한글을 쓰며, 한국어로 말할 수 있으며, 일본의 탄압 없이 대한민국의 땅에서 편하게 살 수 있는 이유는 바
로 자신들의 목숨을 내걸고 싸운 독립운동가들 때문인데 말입니다.
<목차>
1. 독립운동가 집안의 둘째 딸 유관순 , 10대의 나이에 독립운동에 목숨을 걸다.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에 충청남도 천안에서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의 3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 모두 독립운동가로서 활동을 하셨습니다.
유관순이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에 진급한 1919년, 3.1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이화학당 교장이었던 룰루 프라이는 학생들의 안전을 걱정해서 참가를 말렸지만,
당시 이화학당을 다니던 학생들은 담을 뛰어넘어서 나가서 3.1 운동에 참가했습니다.
그중 한 학생이 유관순열사였습니다.
3.1 운동의 여파로 인하여 당시 전 학교에 일제가 휴교령을 내리게 됩니다.
그로 인해서 유관순 열사는 이화학당을 같이 다니던 사촌 언니 유예도와 함께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왔습니다.
고향으로 내려왔어도 유관순 열사의 독립에 대한 의지는 꺽이지 않고, 오히려 불타올랐습니다.
고향인 천안에서도 3.1 운동에 참여했는데, 3.1 운동 중 하나인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에 참여했으나,
만세 운동 중에 유관순 열사의 부모님이 일본 경찰에 의해서 길거리에서 무참히 살해당하게 됩니다.
유관순 열사도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한 친일파 조선인 정춘영에 의해 체포되어서 서대문형무소로 끌려가게 됩니다.
재판을 받던 유관순 열사는 "다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대일본제국 신민으로서 살아가게 될 것을 맹세할 것인가?" 하는 재판장의 질문에
열사는 "나는 왜놈 따위에 굴복하지 않는다. 언젠가 네놈들은 반드시 천벌을 받고 반드시 망하게 되리라."라며 재판장에게 의자를 던졌습니다. 16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짓밟은 일제에게 굴하지 않고 당당한 모습을 보이던 유관순 열사였습니다.
이에 법정을 모독 했다는 이유로 징역 5년형이라는 중형이 내렸으나, 이는 법에 따른 정상적인 형량이 아니었습니다.
이에 유관순 열사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항소하여 복심법원에서 3년형으로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수감된 뒤에도 옥중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고 합니다.
이후에는 1920년 4월에 이왕세자(영친왕)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이방자)의 결혼 기념 특사로 1년 6개월로 감형되었습니다.
2. 일본군의 잔혹한 고문이 시작되다.
형량이 1년 6개월로 감형되었으나,
유관순 열사는 일제의 모질고 혹독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시고
1920년 9월 28일에 17세라는 어린 나이에 감옥에서 순국하셨습니다.
일제의 고문이 얼마나 참혹했던지 이화학당에서 유관순 열사의 시신을 반환할 것을 요구했으나 당시 서대문형무소에서 거부했습니다.
이후에 이화학당 교장 룰루 프라이가 유관순 열사의 시신을 인도받아서 장례를 치러 주게 됩니다.
최근에 밝혀진 바로는 유관순 열사가 옥사한 것이 아니라 일본 헌병들에게 장살(매를 쳐서 죽임)을 당해 사망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고문을 당하다 돌아가셨는지,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셨는데에 대한 것은 불확실합니다.
결국에는 1920년 10월에 시신을 반환받아 10월 14일에 장례를 치르게 됩니다.
이후에 유관순 열사의 유해는 이태원동 공동묘지에 묻히게 되었으나, 일본이 이태원동 공동묘지를 군용 기지로 사용함에 따라서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할 예정이었으나 이장하기 전에 아무런 통보도 없이 무덤을 마구 파헤치는 바람에
유골이 분실되는 사태가 발행하게 됩니다.
이후에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에서 1989년 10월에 매봉산 기슭에 초혼묘(유골이 없는 분의 혼백을 모신 묘)를 만들었습니다.
현재 열사의 묘에는 시신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안중근 의사도 동일하게 초혼묘로 모시고 있습니다. 일제에 의해서 시신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3. 독립운동 명문가 집안의 막내딸, 그리고 유관순 열사의 오빠 유우석 선생
유관순 열사의 가족들 모두 독립 운동에 투신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형제들도 만세를 불렀으며 부모님은 만세 운동을 하는
조선인들을 잔인하게 진압하던 일본 군경의 총칼에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아우내 만세운동 당시에 진압 군경에 총을 맞아서 팔이 잘리고 머리가 절단난 시신들이 많았다고 하니,
얼마나 잔혹하게 진압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인 유중권은 사재를 털어서 고향인 천안에 학교를 세워서 교육 운동을 전개한 계몽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유관순의 오빠이자 장남인 유우석 선생 또한 독립운동가로 공주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일제의 의해서 투옥되었으며
공주지방법원의 재판에서 유관순 열사와 해후를 하기도 했습니다.
유관순 열사의 사망 이후에도 유우석 선생은 활발하게 항일투쟁을 벌였으며
립을 본 후인 1968년 5월 28일 향년 70세를 일기로 자택에서 노환으로 소천하시게 됩니다.
4. 유관순 열사 과대평가 의견
유관순 열사가 훌륭한 활동을 한 것은 맞지만,
유관순 열사의 한 업적에 비해서 지나치게 높은 평가를 받는 인물이라는 주장도 있으며,
학계에서도 이를 인정한 사람들과 부정하는 의견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과대평가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근거는
오히려 여성 독립운동가 중 1920-30년대 근우회나 여성동우회 등 활발한 활동을 하며
당대에 이름을 알리던 신여성 엘리트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유관순 열사는 1947년부터 국내 신문에 자주 등장하며, 영웅적 서사를 가지게 되었으며, 이
화학당 출신의 박인덕, 신봉조가 이화학당을 알릴 인물을 찾게 되면서 독립운동가로 유명해지게 된 것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박인덕은 3.1 운동 때 순국한 유관순 열사를 제안하게 되면서 두 사람은 유관순 열사를 널리 알리기 위해 기념사업회를 구성합니다.
그런데 수많은 항일 운동을 하던 학생운동가 중에서 유관순 열사가 선택된 이유에는
이들이 친일행위를 덮으려는 목적이었다는 의혹이 있습니다.
신봉조는 일제 말기에 전형적인 친일파 노릇을 했으며,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등에
간부로 참여하여 조선인을 일제가 벌이는 전쟁터에 내보내는 데 앞장섰으며,
박인덕 또한 신여성이자 엘리트였지만 신봉조와 같이 친일 행위에 앞장선 매국노였습니다.
해방 후에 본인들이 저지른 수치스러운 친일 경력을 가릴 방패막이가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이화학당 출신의 애국지사를 발굴해 크게 부각시킴으로서 자신들의 매국노 행위를 덮으려고 했으며,
그에 알맞은 인물이 유관순 열사였다는 것입니다.
매국노 박인덕, 신봉조와 다르게 나라를 위해서 본인들의 모든 것을 걸고 투쟁한 여성 독립운동가 윤희순 선생의 일생에 관련한 포스팅입니다.
나라를 위해 싸운 여성 독립운동가 - 미스터선샤인 고애신의 실존 모델독립운동가 <윤희순> 선생
윤희순 선생은 을미의병부터 정미의병 때까지 직/간접적으로 의병운동에 참여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의병 지도자였습니다. 8편의 의병가를 만들어서 많은 청년들과 여성들에게 나라사랑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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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유관순 열사가 10대의 어린 나이에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본인의 목숨을 걸고 만세운동에 참여 했으며,
법원에서도 당당한 모습으로 재판을 받다가 억울하게 형량을 받고 감옥에 들어가서 일본군들에 의해서 잔인하게 고문을 당했고
그로 인해서 순국을 하신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며 열사가 존경받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5. 유관순이 절도범? 망언을 일삼는 21세기 매국노들
대한민국이 일본에 독립을 한 후에 매국을 일삼던 자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못하였습니다.
당시 불안정한 국내상황과 정치적인 이유와 이념 이데올로기로 인해서
매국을 일삼던 자들이 당당하게 경찰로 군인으로 공무원으로 다들 상류층에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걸까요? 21세기 대한민국에는 매국노들이 참 많습니다.
근래에 제일 화제가 되었던 것은 '세종시 일장기부부'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인들의 무식함을 이렇게 들어낼 수 있다는 게 대단한 것 같습니다.
이들 부부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곳곳에는 21세기 매국노들이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본인들의 목숨보다 나라의 독립을 중요시 여기던 그시절 젊은이들의 피로 이루어진 독립과 현재의 대한민국입니다.
당신들의 세치혀로 아무렇게나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 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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