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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으면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나라를 위해 싸운 여성 독립운동가 - 미스터선샤인 고애신의 실존 모델독립운동가 <윤희순> 선생

by yesssi1990 2023.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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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가
윤희순 선생

윤희순 선생은 을미의병부터 정미의병 때까지 직/간접적으로 의병운동에 참여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의병 지도자였습니다. 8편의 의병가를 만들어서 많은 청년들과 여성들에게 나라사랑 정신을 일깨줘 주었습니다. 그리고 4편의 경고문을 지어서 의병과 싸우던 관군 및 의병을 밀고하던 밀고자들, 매국노 및 일본군에게 경고했습니다. 의병 활동 중에 중국으로 망명한 후에는 조선독립단 활동, 항일인재양성을 위한 교육운동에 전념을 한 대한민국을 지켜낸 독립운동가인 윤희순 선생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목차>

1. 드라마'미스터 선샤인' 고애신

2. 여성의병단을 조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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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목차 메뉴 이동 링크5

 

1.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고애신의 실존모델 

윤희순 선생은 1860년 경기도 구리에서 윤익상과 평해 황 씨 사이에서 큰 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인 윤익상은 인조반정 공신이었던 윤희평이 후손으로 대대로 유학자 집안이며 지체 높은 양반 집안이었습니다. 양반의 딸로 태어나서 독립운동을 했던 점이 미스터선샤인 주인공인 고애신의 실존 모델로 이야기되는 것 같습니다. 윤희순 선생은 16세가 되던 해에 고흥 유 씨 집안의 유제원이라는 사람과 결혼하게 됩니다. 선생의 남편은 유제원은 춘천 의병장 외당 유홍석의 장남이자, 팔도창의대장 의암 유인석의 조카입니다.  윤희순 선생이 유제원과 결혼하게 된 계기는 시아버지인 유홍석은 이항로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선생의 아버지인 윤익상도 같이 공부한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이러한 인연으로 두 집안은 사돈 지간이 됩니다. 윤희순 선생은 활발하면서 거침없는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합니다.

 

미스터선샤인 고애신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 고애신

나를 위해서 싸운 또 다른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에 관한 포스팅 내용입니다.

 

나라를 위해 싸운 여성 독립운동가 - 10대의 어린 나이로 독립운동을 위해서 본인의 목숨을 내놓

유관순 열사는 일제 강점기 시대의 독립운동가이며, 10대의 어린 나이에 나라의 독립을 위해 본인의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사의 여성영웅입니다.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사의 지대한 영향을 끼친

youneedme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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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위정척사계열(성리학을 지키고, 외세를 물리치자)의 유생들은 친일내각 타도와 함께 일본세력을 축출하기 위해서 힘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힘을 모으던 중에 1896년 단발령이 발표되자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 일대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춘천에 있던 윤희순 선생의 시아버지인 유홍석도 춘천의 유림들과 함께 이소응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여 의병운동에 나서게 됩니다. 아마도 윤희순 선생이 본격적으로 의병운동에 뜻을 두게 된 계기는 시아버지인 유홍석의 의병활동으로 인한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윤희순 선생은 시아버지 유홍석이 의병활동으로 인하여 10달간 집을 비우게 된 사이 매일 시아버지의 무사 귀가와 의병들의 전승을 기원하며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의병부대가 마을로 들어와 밥을 달라고 요구하면 윤희순 선생은 기꺼이 가족들이 먹어야 할 쌀과 창고의 먹을거리들을 모두 털어서 밥을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또한 선생은 마을 여성들을 모아놓고 "비록 여자라 해도 나라를 구하는 데에는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며 의병을 함께 도울 것을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본이 아무리 강한 나라라고 해도 우리가 힘을 합치면 쉽게 물리칠 수 있으며, 여자라도 나라를 사랑할 줄 알며, 남녀가 유별해도 나라 없이는 아무 소용이 없다며 여자들도 의병에 참여하고 의병대를 도와줘야 한다며 사람들을 설득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물론 선생의 활동에 대해서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선생의 열정에 친척들이 먼저 이에 동의해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반대하던 사람들도 나중에는 선생의 의견에 찬성하게 되어서 의병들이 오면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게 되었다고 합니다. 

 

2.  여성의병단을 조직하여 활동하다.

1907년 일제가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며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 시키자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게 됩니다. 춘천에서는 시아버인 유홍석이 의병 600명을 모아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이에 윤희순 선생은 적극적으로 의병 활동에 참여하게 됩니다. 춘천의병의 의병장 부인, 고흥 유 씨 집안의 여성들 그리고 향촌 여성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아서 놋쇠와 구리를 구입하고 탄환, 유황 등으로 화승총에 쓸 화약을 직접 제작, 공급하는 탄약제조소를 운영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자의병 30명을 모아서 다른 의병들을 뒷바라지하거나 의병 훈련에 참여하게 합니다. 비록 여자의병들은 직접 전투에 참가하지는 못하였지만, 후방에서 직접 전투하는 의병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의병운동에 힘을 쏟았습니다. 또한 윤희순 선생은 직접 남장을 하고 정보 수집을 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윤희순 선생은 적극적인 의병운동 지원 뿐만 아니라, 8편의 의병가와 4편의 경고문을 제작하여 구국활동을 촉구하기도 하였습니다. 선생은 의병을 돕는 일도 고생스러웠지만 의병가, 경고문 등을 가사로 지어 노래로 부르도록 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을 남자들 모르게 하느라 고민이 많았다고 합니다. 선생은 많은 사람들이 의병운동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선생의 간절한 노력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은 윤희순 선생이 지은 가사를 따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선생의 노력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의병활동에 참여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3. 중국 망명,  항일인재 양성 및 독립운동을 이어나가다.

1910년 한일병학(경술국치)이 이루어지자 시아버지인 유홍석은 크게 낙담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서 가족과 함께 자결하기로 결힘하였으나, 아들인 유제원이 적극적으로 만류하며 요동으로 건너가서 후일을 기약하자고 설득하게 됩니다. 시아버지 유홍석과 남편인 유제원은 중국으로 먼저 떠났습니다. 윤희순 선생은 가산을 모두 정리한 다음에 뒤를 따라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시아버지와 남편이 떠난 이튿날에 일본 경찰과 앞잡이들이 집으로 들이닥치게 됩니다. 이들은 시아버지 유홍석의 행방을 물었습니다. 선생은 경찰과 앞잡이들에게 시아버지 유홍석의 행방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자 그들은 어린 아들을 매질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윤희순 선생은 흔들리지 않고 "자식을 죽이고 내가 죽을지언정 큰 일 하시는 시아버지를 죽도록 알려줄 줄 아느냐"며 흔들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선생의 어린 아들이 매질을 당하는 모습을 보았지만  굳은 의지로 인하여 일본 경찰과 앞잡이들은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윤희순 선생은 가산을 모두 정리한 1911년 시아버지와 남편의 뒤를 따라서 아들 세명(돈상,민상,교상)을 데리고 중국으로 망명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1935년까지 25년 동안 가족들과 함께 요동지구를 떠돌아다니며 항일운동을 전개하게 됩니다. 그 시간은 굉장히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남자들이 모두 의병운동을 하러 집을 떠나자 초가집에는 노약자, 어린아이들, 여성들 뿐이었습니다. 윤희순 선생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젊은 여성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서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생계를 유지하였습니다. 중국인들에게도 찾아서 식량을 구걸하며 도움을 받게 됩니다. 양반으로 태어나서 이러한 삶을 살 필요 없었던 선생이지만, 나라를 위해서 하루하루 연명하면서 의병들을 뒷바라지하게 됩니다. 또한 윤희순 선생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웃마을의 조선인과 중국인들에게 항일선전을 하면서 군자금을 모아서 항일운동단체에 전달하기도 합니다. 

여성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윤희순 선생 동상

선생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항일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하여서 이회영, 우병렬, 우병렬의 부인인 채인산, 중국인 도원훈과 손홍령의 도움으로 환인현 에 동창학교(만주에 설립된 민족계 학교) 분교인 노학당을 창립하게 됩니다. 환인현에 노학당을 설립한 이유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서 이주한 조선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으며, 반일활동의 근거지였기 때문입니다. 학교운영자금은 선생과 학생들이 환인현에 거주하는 조선인 및 중국인들에게 모금한 것으로 충당하게 됩니다.  선생은 학교와 25km 떨어져 있는 곳에서 살았습니다. 선생이 살던 곳은 마차나 달구지도 들어가기 힘든 산속이어서 매일 몇 십리나 되는 길을 걸어 다니면서 학교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모집하는 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주변의 이웃들에게는 항일애국노래등을 가르쳐주면서 항일 애국심을 고취시켰습니다. 윤희순 선생의 이러한 노력으로 인하여 1915년까지 김경도, 박종수, 이정헌, 마덕창 같은 50여 명이 넘는 항일운동가를 양성하게 됩니다. 그러나 일제의 간섭으로 인해서 1915년 노학당은 문을 닫게 됩니다. 1913년에는 시아버지 유홍석이 세상을 떠나고, 1915년에는 남편 유제원마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가족들이 죽고 노학당까지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문을 닫게 되면서, 환연현에서 살 수 없었던 선생은 1915년 막내아들 교상을 데리고 떠나 무순 지역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무순 지역을 중심으로 선생은 조선독립단과 그 가족부대를 조직하고, 조선독립단학교를 설립합니다.

 

조선독립단은 선생의 도움에 의해서 아들 유돈상을 중심으로 조직됩니다. 윤희순 선생과 아들 유돈상은 항일선전으로 중국인들을 각성시키고 연합투쟁을 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하고 조선독립단을 한중 연합으로 조직하게 됩니다. 유돈상은 만주와 공모에 흩어져 있는 할아버지 유홍석의 문인, 친지들, 항일운동가들을 찾아 다니며 180여 명의 조선인들과 중국인들을 모집하게 됩니다. 조선독립단학교에서는 항일운동가 양성을 위해서 국권회복과 항일투쟁에 대해 강의를 했습니다. 조선독립단의 학생들은 낮에는 농사일을 하였으며, 밤에는 무순의 북산 마을 뒷산에 올라가서 군사훈련을 하였습니다. 윤희순 선생은 독립단 가족부대를 만들어서 직접 군사훈련에 참가하였습니다. 지도자가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이유로 백발을 휘날리며 직접 군사훈련에 참가하였습니다. 무순 지역에 살던 주민의 인터뷰에 의하면 "그때 우리는 조선독립단 가족 부대를 무서워했습니다. 밤중에 산에서 총소리가 난 적도 있었습니다. 윤할머니(윤희순 선생)는 이따금 우리 중국 사람을 찾아와서 같이 일본 놈을 쳐부수자고 선전하였습니다."며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노인이 되었어도 독립에 대한 열정과 일제를 무너뜨러야 한다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4. 독립운동을 하던 아들, 일제의 고문으로 숨지다.

슬프고도 슬프다, 이내신세 슬프도다, 이국만리 이내신세 슬프고도 슬프도다, 보이는 눈 쇠경이요 들리는 귀 막혔구나, 말하는 입 벙어리요 슬프고도 슬프도다, 이내신세 슬프도다 보이나니 까마귀라, 우리 조선 어디 가고 왜놈들이 득실하나, 우리 인군 어디 가고 왜놈대장 활기 치나, 우리 의병 어디 가고 왜놈군대 득실하니, 이내몸이 어이할고 어디 간 들 반겨줄까, 어디 간 들 반겨줄까 - 윤희순 선생 신세타령 

1930년대 초 윤희순 선생은 중국의 요녕성으로 이주하여서 항일 운동을 전개였습니다. 일본군과 앞잡이들이 갑자기 들이닥치면서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모든 살림과, 서적, 사당이 불타버렸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조선독립단원들은 산속에 숨어서 지냈습으며, 여자 가족들은 일본군에게 끌려갔습니다. 윤희순 선생은 석방된 후 중국인들의 주선으로 작은 집을 얻어 지냈습니다. 얼마 후 아들 돈상과 교상이 찾아왔습니다. 며칠간 친적집으로 가서 지내다가 아들 돈상이 조선독립단으로 가고 다른 가족들과는 모두 흩어지게 됩니다. 이때 선생은 죽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광복이 된 후 자손들이 잘 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 죽을 수 없었습니다. 선생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할 수 없었습니다. 현실이란 피하고 싶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윤희순 선생은 중국인의 집과 친척 집을 돌아다니며 피신하다가 해성현으로 이사했습니다. 다시 이곳을 항일운동의 근거지로 삼았으습니다.

 

아들은 유돈상은 각지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장인 음성국과 함께 일본 헌병에 체포되었습니다. 이후에 혹독한 고문을 받고 풀려났으나, 집에 돌아오던 중 윤희순 선생의 품 안에서 순각하게 됩니다. 자식을 먼저 보낸 윤희순 선생의 마음이 어땠을까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아들이 먼저 순국한 후 선생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아들 유돈상이 순국한 지 11일 만인 1935년 8월 1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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