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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으면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조선의 역사 - 조선 시작, 창업군주 '태조 이성계'

by yesssi1990 2023.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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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

이성계는 조선의 창업군주이자 제1대 왕입니다. 조선 건국 후 재위 기간은 1392~1398년입니다. 고려말 홍건적, 왜구 등의 침략을 막아내고 격퇴하면서 고려말 큰 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고려의 수도 개경으로 돌아와서 당시 고려의 수호신이라고 불리던 최영을 제거하고 고려의 우왕을 폐한 뒤에 창왕을 옹립해서 고려의 정치, 군사적 실권을 장하게 됩니다. 이성계는 고려의 신진사대부들의 적극적인 지지에 힘을 입어서 신흥 정치세력의 대표로서 기반을 닦아 공양왕을 내쫓아 고려를 없애고,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면서 새 왕조의 태조로 즉위했습니다.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고 수도는 한양으로 천도하여 새 시대를 열게 됩니다. 

실력이 뛰어난 무인 집안에서 태어나다.

이성계의 선조 이안사는 원나라의 지배 아래 여진인이 살고 있던 남경(간도지방)에 들어가서 원나라의 지방관이 된 뒤부터 그 지역에서 기반을 닦이 시작했습니다. 이안사의 아들 이행리, 손자 이춘이 대대로 두만강 또는 덕원지방의 천호(지방 군을 관할하던 하급 무관직)로서 원나라에서 벼슬을 했습니다.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도 원나라의 총관부가 있던 쌍성에서 천호로 있었습니다. 이자춘은 1356년(공민왕 5) 고려의 쌍성총관부 공격 때 도움을 주어서 원나라 세력을 축출하는데 큰 공을 세우고 고려의 벼슬을 받았습니다. 이자춘은 1361년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군사와 민사행정을 총괄하던 지방 장관)로 임명되어 동북면 지방의 실력자가 됩니다. 

 

이성계는 태어날 때부터 임금다운 얼굴과 신체는 영특하고 준수하며, 지략과 용맹은 동년배 아이들의 비해서 월등하게 뛰어났다고 합니다.  이러한 가문의 배경과 타고난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고려에서 크게 활약하면서 군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1361년 10월에 반란을 일으킨 독록강만호 박의를 잡아 죽였으며, 같은 해 홍건적이 침입해 수도가 함락되자 이듬해 군인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탈환작전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우게 됩니다. 이후에도 끊임없이 나라가 위험할 때마다 뛰어난 활솜씨와 지휘력으로 홍건적과 왜구를 연달아 막아내며 고려의 영웅이 됩니다. 이성계의 활약상은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성계는 30여 년 동안 전쟁에 나가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지만, 왕으로서 은퇴 후 '조사의의 난'에서는 크게 패배했다고 알려졌습니다. 

 

역사적인 만남, 정도전이 찾아오다.

정도전은 공민왕 시해 후 우왕이 집권하게 되면서 보수 친원정책으로 바뀌려고 하는 것을 극렬하게 반대하다가 유배를 떠나게 됩니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 중앙정계에 다시 진출하는 것을 실패한 정도전은 방랑자처럼 1383년 가을에 함주(함흥)로 향하게 됩니다. 바로 이유는 고려의 수호자라고 불리던 이성계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정도전은 단순히 이성계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찾아온 게 아니었습니다.  정도전은 유배지에서 부패한 권력자들로 인해서 힘들게 살아가는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하고 느꼈습니다. 백성들에게 부끄러움과 고마움을 표현하는 글을 남기며 본인만의 정치적 신념을 굳히게 됩니다.  부패한 고려사회를 개혁하기로 마음을 먹게 됩니다.

정도전

당시에는 홍건적과 왜구들의 침입으로 인하여 무장들의 활약이 두드러지던 시기였습니다. 고려시대 그 중 최고로 돋보이던 무장들은 최영과 이성계였습니다. 당시에는 이성계는 새롭게 떠오르는 스타였으며, 최영은 고려를 구한 구국의 영웅이었으나, 정도전은 이성계를 찾아가게 됩니다.  최영장군은 60대의 고령의 나이였으며, 고려 사회의 부패의 원흉이나 다름없던 권문세족 이인임과 같은 정치노선으로 인하여 정도전은 최영보다는 이성계를 택하게 됩니다. 

 

당시 여진족 호바투군을 처리하기 위해 함주에 있던 이성계의 막사를 찾은 정도전은 군사들의 군기와 흐트러짐 없는 질서에 감탄하게 됩니다.  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군사들이 훌륭하군요. 이런 군대로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라고 정도전이 말하니까 이성계는 무슨 뜻인지 물었으나, 정도전은 왜구를 물리칠 수 있다는 말이라며 얼버무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성계는 정도전의 말을 뜻을 알아챌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둘은 부패한 고려사회 개혁이라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정도전과의 짧은 첫 만남 이후에, 이성계와 정도전은 만남을 지속하게 됩니다. 그리고 고려 말기인 1388년 요동정벌을 위해 출격한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수도 개경으로 돌아왔으며 쿠데타에 성공하게 됩니다. 왕명을 어기고 군 총지휘관이었던 이성계의 독단으로 주력군을 움직인 사실상의 쿠데타로, 이성계에 의한 역성혁명의 시발점이었습니다. 사실 이성계 혼자만의 쿠데타라고 볼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이렇게 조선 건국이 한 발자국 다가오게 됩니다. 

창업군주로서 조선을 건국하였지만, 불행한 말년을 지내게 되다.

 1392년 7월 17일에 공양왕이 왕대비에게 준 옥새를 이성계가 받아 들어 주변 측근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조선왕조가 시작되었습니다. 1393년 2월 15일에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고, 1394년에는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수도로 정하고 옮기게 됩니다. 바로 재상 중심 정치를 꿈꾸던 정도전을 중심으로 고려의 기존 제도는 급진적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런 과정에서 왕위 계승권 문제로 난이 일어나게 됩니다. 바로 조선 건국 후 6년이 지난 1398년 8월 26일 일어난 제1차 왕자의 난입니다. 

조선 건국 후 건국에 공이 있었던 인물들이 개국공신으로 책봉되며 권력과 명예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왕실 및 종친은 개국공신에 책봉되지 못하고 권력의 일선에서 배제되었습니다. 이는 개국 과정에서 지대한 공이 있었던 왕자와 종친의 불만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또한 건국 직후 세자를 책봉하는 과정에서 장자 혹은 개국 과정에서 가장 공이 많은 자를 책봉하는 등의 원칙을 분명히 세우지 않고, 계비 강 씨 소성의 막내아들은 방석을 책봉하게 됩니다. 이는 당연히 다른 왕자들의 불만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특히 개국 과정에서 가장 공이 많았던 신의왕후 한 씨의 소생 왕자들, 특히 이방원의 불만을 일으키게 됩니다. 세자를 책봉할 때에는 많은 개국공신들은 장자 혹은 공이 많은 자를 세우자고 건의하였으나 이성계가 계비 강 씨의 뜻으로 강 씨 소생 아들 중 첫째인 방번을 세자로 세우려고 했으나, 방번이 성격이 굉장히 포악하여 막내인 방석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에도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왕자들과 종친들을 권력 일선에서 배제하려는 시도가 계속되었으며, 이런 와중에서 세자의 가장 절대적인 지지자라고 할 수 있는 계비 강 씨가 1396년에 죽게 됩니다.  갈등은 1398년에 최고조에 달하게 됩니다. 국가 체계를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왕자들과 종친들이 보유하고 있던 사병들을 국가로 흡수하려고 하는 사병혁파로 인해서 왕자들과 종친들이 크게 반발하게 됩니다.  갈등이 최고조 되던 무렵에 이성계 마저 병석에 드러눕게 됩니다. 이성계의 병환은 왕자들에게는 기회로 인식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정도전과 개국공신들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하게 됩니다. 임금의 병을 문안한다는 핑계로 모의하면서, 왕자들을 모두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이러한 계획은 정도전의 편이었던 이무라는 자가 이방원에게 전달해서 알려지게 되었고 이방원 측은 이들보다 한 발 앞서서 그들을 습격해서 제거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방원과 왕자들은 세자 방석을 폐위하여 귀양 보내는 도중에 살해하였고, 방번호 죽이게 됩니다. 또한 방석, 방번의 동복 누나인 경순공주의 남편마저 죽이게 됩니다.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면서 창업군주가 되고, 귀한 존재인 왕이 되었지만 왕위 계승권 때문에 형들이 동생들을 죽이는 것을 막지도 못하고 지켜보게 됩니다. 저는 이 글을 쓰면서도 이성계가 과연 행복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왕은 되었지만 형제끼리 서로 죽이고 죽이려고 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성계는 이후로 건강히 급격하게 나빠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라고 해도 살고 싶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다.

 이성계는 1398년 9월에 왕위를 둘째 아들인 방과(정종)에게 물려주게 됩니다. 이방원이 아니라 이방과가 왕위를 물려받게 된 이유는 아버지를 협박해서 왕위를 찬탈한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걱정한 이방원이 둘째 형인 방과에게 왕위를 받게 한 것입니다. 2년 후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넷째 형인 이방간마저 물리치고,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넘겨받아서 조선의 3번째 왕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하지만, 왕위를 둘러싼 자식들의 목숨을 건 권력 다툼에 회의를 느낀 이성계는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고향인 함경도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게 됩니다. 이성계는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을 죽을 때까지 몹시 증오하였지만, 이미 태종 이방원은 조선의 대세가 되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방원은 이성계를 모셔오기 위해서 매번 차사를 보냈지만 이성계는 아들이 보낸 차사들을 모조리 죽여서 돌려보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때 나온 말이 심부름을 간 사람이 소식이 없거나 회답이 좀처럼 오지 않을 때 쓰는 함흥차사란 말이 나오게 됩니다. 이후에 이성계는 무학대사의 간곡한 설득으로 인하여 한양으로 돌아와서 태상황의 자리에 있다가 창덕궁에서 74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됩니다. 

 

이성계무덤
이성계 능 / 건원릉

고려를 구한 구국의 영웅에서 시작하여서 역성혁명에 성공해서 조선을 건국한 창업군주가 되었지만, 자식들의 왕위 찬탈 전쟁으로 인하여 죽게 되는 모습을 보면서 말년을 외롭고 씁슬하게 보낸 이성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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