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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으면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대한민국 제11대, 12대 대통령 -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by yesssi1990 2023.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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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은 대한민국 제11대, 12대 대통령을 지냈습니다.  전 씨는 대한민국 국민이 모두 알고 있듯 6월 민주항쟁으로 독재정치에서 물러났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반성은커녕 본인이 잘못한 게 무엇이냐며 떳떳하다고 말하는 모습일 보였습니다. 그런 전두환이 세상을 떠난 지 2년이 지난 지금 다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바로 전두환의 손자의 폭로로 인해서입니다.  

 

<목차>

1. 전두환 군부세력으로 나라의 정권을 장악하다.

2. 대통령 사임, 구속, 그리고 사망

3. 정치 라이벌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일화 

4. 5.18 광주민주화운동, 그리고 무고한 시민 학살

1. 전두환 군부세력으로 나라의 정권을 장악하다.

전두환은 1931년 1월 18일 경상남도 합천군에서 태어났습니다. 전두환은 1945년까지 일본의 식민 통치 하에 있었기 때문에 한국 역사에서 가장 격동의 시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에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전 씨는 해방 이후에 육군사관학교에 11기로 입교하였고, 1955년 육사 졸업과 동시에 군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1961년 서울대학교 학생군사교육단에서 고관으로 근무하던 중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육사 생도를 동원하여 군부 지지 시가행진을 벌였고, 이일로 인해 박정희의 신임을 얻어서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관이 됩니다. 

 

전두환
전두환 군인시절

박정희 집권 이후 노태우 등 육사 동기들과 함께 육군 내 사조직은 하나회를 결성하여서 박정희의 비호를 받으며 군대에서 승승장구합니다. 1973년 3월에는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임명되었는데, 같은 해 10.26 사건이 터지자 계엄법에 의거하여 보안사령관으로서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게 됩니다. 이때 수사본부장이라는 직책과 자신이 이끌던 하나회를 통해서 12.12 군사반란으로 군을 장악하고, 이듬해 1980년 5.17 내란을 일으켜 헌정을 중단하였습니다. 그리고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민들의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잔혹하게 학살하였고 구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신설하여 국정의 실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이후 최규하 대통령직을 사임함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치러진 제11대 대통령에 올랐습니다. 7년 단임 대통령제를 골자로 하는 새 헌법을 통과시킨 후,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제1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대통령에 당선되며 제5공화국을 출범시켰습니다. 사실 그 선거는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은 직선제가 아니었고, 99%의 득표율로 당선된 체육관 대통령 선거였습니다. 이후에 임기 말이던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인해서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시위가 더욱 거세졌습니다. 이런 국민들의 시위를 불식시키고자 4.13 호헌초치를 발표하였으나 오히려 국민들의 반발만 더욱 거세지는 역풍이 일어났으며, 그로 인해서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결국 집권여당은 민주정의당의 대선 후보 노태우가 6.29 선언을 발표함에 따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진행하였으며, 전두환은 이후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게 됩니다. 

 

2.  대통령 퇴임 후에 구속, 사면 그리고 혈액암 진단 이후 사망까지

전두환은 1980년부터 1988년까지 대한민국을 통치한 독재자였습니다. 전두환의 정권 동안 수많은 인권 침해 및 부패가 심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참을 수 없었던 국민들은 민주화 시위로 전두환의 독재를 멈추게 합니다. 전두환의 체포는 대통령 임기를 끝마치고 바로 이루어지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충신들과 지지자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들어서면 전두환은 체포되게 됩니다. 전두환의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저지를 부패, 횡령, 그리고 권력 남용 및 인권 침해에 대한 증거를 찾아냈으며 1952년 12월 3일 전두환은 서울에 있는 연희동 집에서 체포되었고 반란, 반역, 부패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전두환은 재판은 2년 동안 지속 되었고, 전 씨는 모든 혐의에 대해서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새롭게 선출된 김대중 대통령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두환과 같이 수감되었던 노태우의 사면을 건의했으며 김영삼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여서 사면되게 됩니다. 이후에 출소한 전두환은 군인시절부터 살던 연희동의 안전가옥에서 철통경호를 받으며 심심하면 골프를 치러 놀러 다니는 등 호화로운 생활을 이어나갑니다. 바로 독재자 시설에 국민들의 혈세로 만든 비자금으로 말입니다. 그 이후로 90살까지 정정한 모습을 보여주며 대통령 취임식, 장례식 등 청와대 행상에 꾸준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학살 관련하여 재판을 받으러 광주지방법원에 출두 후에 건강이 극도로 나빠져서 신촌에 있는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으며, 악성 혈액암인 다발성 골수종 진단을 받게 됩니다. 

전두환 이순자
전두환과 이순자

2021년 11월 23일에 연희동 집 화장실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었고, 결국 사망합니다. 혈액암 진단 받은 후에도 건강한 모습을 유지하던 전두환은 그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3. 정치 라이벌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일화 

전두환은 자신이 집권한 기간 동안 줄곧 김대중 대통령을 탄압하고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선고까지 해서 죽이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대통령은 본인을 자주 청와대로 초청해 국정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나누는 등 전직 대통령으로서 예우를 해줬습니다. 이점에 대해서 전두환 본인도 감사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김대중 대통령 서거 당시 "항상 감사하고 존경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서거 직전 병문안도 직접 갔으며 서거 때도 영결식장에도 참석해서 애도를 표했습니다.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노무현,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과 전두환

반면에 김영삼 대통령과 관계는 계속 껄끄러웠습니다. 전두환은 독재자로 집권하는 기간동안 김영삼 대통령을 가택연금 시켜버려서 아들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에서 입국할 당시 직접 마중을 나가려고 했지만 전두환이 군인들을 보내서 집에서 못 나오게 하고, 정계에 발을 딛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등 대통령 재임 당시에 김영삼 대통령을 줄곧 탄압해 왔습니다. 탄압을 받던 김영삼 대통령은 이후에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되면서 전두환 권력의 핵심이었던 하나회와 5 공화국 인사들을 개박살 내었고, 전두환을 감옥에 처넣어서 전 대통령 예우를 받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퇴임 후에도 전두환이 대통령감이 아니라고 맹비난을 퍼부었으며 2010년에 전직 대통령 회동 자리에서도 김영삼 전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이었던 이명박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에게 큰 목소리로 "전두환이를 왜 불렀니? 쟈는 대통령도 아니데이. 죽어도 국립묘지는 못 간다."라고 말했으며, 오찬 시간에 "와인 더 없느냐"는 전두환의 말에 "니는 청와대에 술 쳐 무러 왔나?"라고 망신을 준 사례는 유명합니다. 그러나 2015년 김영삼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장례식에 참석하여 조문해서 상당한 화제가 되었습니다. 

 

4. 5.18 광주민주화항쟁,  전두환 권력에 눈이 멀어 무고한 시민들을  잔혹하게 학살하다.

전두환은 쿠데타로 권력을 장하고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며 본인과 반대되는 인사들을 잔혹하게 탄압하였으며, 5.18 광주민주화항쟁에 참여한 시민들을 잔혹하게 학살한 한국의 역대 독재자 중 최악의 대통령입니다. 전두환 대통령 재임시기는 부패와 인권 유린으로 점철되었습니다. 그리고 사회를 분열시켰습니다.  

 

한국 근현대사 비극적 사건 시리즈 - 3. 5.18 광주민주화 운동

1980년 5월 18일, 5월의 광주는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떨어진 아이와 같이 외로웠을 겁니다. 신군부 세력은 국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탄압하고 그에 맞서서 싸운 광주의 시민들 곁에는 아무도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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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나 전두환은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나자 전두환을 중심으로 구성된 신군부가 권력을 장학하면서 전국적으로 민주화에 대한 열기가 거세지자 반란군은 비상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게 됩니다. 군사반란으로 인하여 전국적으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으며 그중에서도 전라남도 광주시(현재 광주광역시)에서 대규모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계엄군은 민주화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서 시민들을 푹 동적 시위진압 방법으로 진압했습니다. 단지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시위에 참가한 무고한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성폭력 등의 성범죄를 저질렀으며 심지어 불법처형도 저질렀습니다. 무기를 들고 있지 않은 민간인을 향해 총기까지 사용하면서 탄압했습니다. 자신의 이웃, 가족, 친구들이 무자비하게 당하는 모습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던 시민들이 시민군을 조직, 대항했지만 군사훈련을 받고 최신식 무기까지 들고 있던 신군부에게 철저하게 진압당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광주민주화항쟁은 군사 독재정권의 인권 탄압과 민간인 살해 사례로서 전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단순하게 한 줄로 설명하기에는 당시 상황이 너무나 참혹했습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 수준의 저항권을 행사한 사건입니다. 전두환을 지지하는 극우파에서는 광주민주화운동을  간첩에 의한 무장 폭동이라고 어이없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지만 대한민국 대법원에서는 여러 차례 그러한 주장에 대해서 근거가 없음을 확인했으며, 정당한 저항권 행사로 해석했습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및 6월 민주화항쟁을 보면서 느낀 점은 자유 저절로 얻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유와 민주화는  피로 쌓인 땅 위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비겁해지지 않으면, 죽음 밖에 없던 시절에 비겁해지지 않고 정의를 위하여 민주주의를 위하여 노력하신 대한민국의 모든 분들에게 감사함을 표합니다.

 

그리고 요즘에 전두환의 손자 전우원씨로 인해서, 죽은 지 2년이 지난 전두환의 이야기로 시끄럽습니다. 전두환과 그의 가족들이 죄를 뉘우치고 진심으로 피해자들에게 사과를 하고 벌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그들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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