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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으면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일본의 만행 시리즈 1 - 관동대지진 그리고 조선인 대학살

by yesssi1990 2023.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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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은 1923년 9월 1일 일본 도쿄, 요코하마 등 대도시권을 강타한 리히터 7.9 규모의 지진은 화재, 산사태, 건물 시설 붕괴 등 광범위한 파괴와 혼란은 야기했으며, 이때 약 3-4주간 일본의 전 지역에서 조선인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일본인들이 재난을 틈타 조선인을 대상으로 헛소문을 퍼트려서 끔찍한 살육을 벌이게 됩니다. 조선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일본인들도 살해당하기도 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일본의 군과 관이 개입하게 되었으며, 학살자의 대다수는 민간이었다고 합니다.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분열된 내부를 통합하기 위해 분노를 이용한 사례이며, 일본은 조선인에 대한 증호, 허위선동을 부추겼습니다.  민간인들이 학살하긴 하였으나, 사실은 일본 정부의 지도자들이 내부를 통합하기 위해서 벌인 사건이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로 인해서 수만에 달하는 무고한 조선인이 잔혹하게 살해당했습니다.

 

 

 

<목차>

1. 관동대지진, 잔인한 학살의 시작

2. 관동대지진, 조선인 인명피해

3. 뻔뻔한 일본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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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동대지진, 잔인한 학살의 시작 

관동대지진의 여파로 인하여 일본 사회는 혼란과 분열이 시작 되었습니다. 내부적으로 분열되어서 사회는 무너지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내부의 분열을 통합하기 위해서 외부의 적을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조선인들은 당시 일본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가지고 있던 외국인이었으며, 일본 사회 내에서 조선인들은 차별과 편견의 대상이었습니다. 일본 정부에서는 지진으로 인한 여파를 조선인들의 책임으로 돌려서 일본 사회 내부를 통합하기로 합니다.

 

관동대지진학살
일본군의 조선인 학살

지진으로 인한 사회의 혼란 속에서, 자경단과 일반 시민들은 조선인, 조선인들의 가정, 조선인들이 운영하는 상점 등을 무자비하게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당시에 조선인이 많이 거주하던 요코하마에서는 빈번하게 폭력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최소 수쳔 명 이상의 조선인들이 죽거나 다쳤으며, 많은 조선인들이 집을 잃고 길거리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사실 조선인들에 대한 폭력과 편견 그리고 차별은 일본의 팽창주의적 야망을 정당화하려는 민족주의적이고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증가하게 된 것입니다. 많은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은 열등하고 본인들과 동등한 대우와 권리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관동대지진학살
관동대지진 때 무고하게 학살 당한 조선인

지진이 발생한 후 일본 사회에서는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지진으로 인한 혼란을 틈타서 일본인들을 약탈하거나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는 등 관동대지진에 책임이 있다는 헛소문이 퍼지기 시작합니다. 일본 신문과 정치인들은 외국인 혐오와 민족주의의 불길을 부채질하여 일본에서 조선인들을 추방하거나 추방할 것을 요구하며 선동질하기 시작합니다.  혼란산 내부상황과 언론과 정치인들의 선동으로 인하여 지진이 일어난 후 몇 주 동안에만 자경단과 일반 시민들이 조직한 폭력배들이 조선인들을 무차비하게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칼, 곤봉, 죽창과 같은 무기를 사용하여 무차별적으로 때리고 찌르고 죽였습니다. 많은 조선인들의 본인들이 살던 집에서 산 채로 불에 타 죽거나 조선인인 것을 알게 된 자경단들이 혀를 자르는 인간이라면 하면 안 되는 처참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일본군인과 경찰을 개입하지 않거나 오히려 적극적으로 폭력이나 살인에 참여함으로써 공격에 가담했습니다. 

 

2. 관동대학살로 인해서 수많은 조선인이 학살 당하다.

관동대학살로 인해서 사망하거나 피해를 입은 조선인들의 정확한 숫자는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들이 신고되지 않았거나 일본 당국에 의해서 은폐 되었기 때문입니다. 최소 수천에서 수만, 수십만까지 다양하며, 많은 조선인들이 집을 앓고, 가족을 잃고, 폭력으로 인해서 정신적 충격을 받았습니다.  

관동대지진
관동대지진 때, 일본인들에게 학살당한 조선인들

학살된 조선인의 수가 자료에 따라서 편차가 심해서 정확한 피해자의 수에 대해서 논란은 현재까지도 지속되어 왔습니다.  처음에는 최소 수쳔 명 단위 학살이었다는 소문이 돌았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독립신문에 1923년 12월 5일 자 자세한 보고서를 통해서 6,661명의 조선인들이 희생을 당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희생자 중 상당수가 지진으로 인한 희생자이기 때문에 말이 되지 않는 조사라며 강하게 항의하였고, 실제로 학살로 인한 희생자의 주는 약 300명 미만이라고 사법성 명의로 공식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발표는 신빙성이 매우 낮다고 평가됩니다.  일본 정부가 학살에 대해서 인정을 하고 벌인 각종 재판에서 확인된 조선인 희생자 숫자만 일본 정부의 공식발표(약 300명)를 가볍게 뛰어넘는 약 900명이기 때문입니다. 일본 학자 요시노 사쿠조는 2,711여 명이 희생되었다고 추정했습니다. 

 

3. 뻔뻔한 일본 정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거짓말을 일삼다.

관동대지진으로 인한 조선인 학살의 일본 정부는 공싱적으로 인정하지 않거나, 경시되어 왔습니다. 일본 정치인들은 일본 사회의 문제가 아닌 당시 대지진이라는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일 뿐이라며 폭력이 있었어도 부인하거나 폭력의 정도를 최소화했습니다. 관동대지진 1주기를 앞둔 1924년 8월 13일 재일교포 옥순철이 조선인들을 위한 추모행사를 열어야 한다고 촉구한 바가 있으며, 조선에서는 관동대학살로 살해당한 조선인들을 위한 추모식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방해로 인해서 원만하게 진행하지 못했으며 1925년 이후에는 잊히게 됩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관동대지진은 일본, 일본인에 의한 조선인들에 대한 폭력과 차별의 명백한 사례를 보여주기 때문에, 한국인들에게는 충격적이고 싶은 의미가 있는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관동대학살은 일본 정부에서 부정하며, 일본 내에서 살고 있는 조선인(한국인)에 대한 오래된 편견과 소외 폭력에 대한 증거로 인용되어 왔습니다. 아직도 일본 정부는 본인들의 만행에 대해서 책임지려고 하는 의사가 전혀 없으며, 오히려 부정하며 본인들의 잘못이 없다고 뻔뻔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피해 국가인 대한민국 정부도 그 책임에 대해서 일본 정부에 보상과 사과를 요구하지 않으며 오히려 피해자들을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이 서로 진정한 사이로 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가해자들이 피해자들에게 진정한 사과를 해야 하며, 그렇지 못하다고 하면 대한민국 정부가 피해자들을 위해서 정당한 사과와 보상을 받아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를 잊고 미래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가해자들은 다 잊었겠지만, 피해자들은 진정한 사과와 보상 없이는 영원히 그 시절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일제의 만행을 묻어 놓고 미래로 가야 한다는 정치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과연 그것이 대한민국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는지 말입니다. 당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그런 게 아닌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물론, 그들은 생각하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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