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은 대한민국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다국적 기업입니다. 2022년 기준 자본총액 기준으로 대한민국 재계서열 1위입니다. 그 외로 시가총액 등 기업 평가 요소의 모든 영역에서 재계 2위 그룹과 압도적인 격차를 보입니다. 단순하게 기업의 규모를 제외하고서도, 대한민국의 경제, 사회, 정지,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다른 기업들과 비교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룹입니다.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런 삼성그룹의 제3대 총수가 된 이재용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삼성그룹 전 회장 이건희와 그의 아내 홍라희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다.
이재용은 1968년 6월 23일 이건희 전 회장과 홍라희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경기초등학교, 청운중학교, 경복고등학교, 서울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졸업 이후에 일본의 명문대인 게이오기주쿠대학에서 MBA를 취득했으며, 그다음에는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습니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것은 아닙니다. 말 그대로 박사 과정을 수료했습니다.
서울대학교 진학 당시에 유명한 일화로는 삼성그룹의 창업자이자 조부인 이병철 회장이 "경영학은 나중에도 금방 배울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을 이해하는 폭을 넓힐 수 있는 인문학을 전공하라"고 권유해서 동양사학과에 입학했다고 합니다. 인문학은 곧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류가 현재까지 구축해 온 여러 사회의 변화상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를 바탕으로 바라보는 본인 나름대로의 관점과 통찰력을 만들면 경영을 배우면서 심화하고 발전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입니다. 이병철은 이런 부분을 생각하고 손자인 이재용에게 인문학 공부를 추천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서울대학교 입학 이후에 이재용의 대학 생활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재벌집 도련님하고는 상당히 거리를 둔 생활을 합니다. 학교에서는 또래 동급생들과 함께 생활했으며, 학적부처럼 아버지 직업란을 적는 곳이 있으면 회사원이라고 기입했다고 합니다. 여동생인 이부진 사장이 대학 때 소개팅 나가서 아버지 직업을 물어본 상대방한테 일반 회사원이라고 말했다고 했던 일화가 생각납니다. 그래도 동기들은 이재용의 집안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80년대 서울대 인문계열은 운동권 학생들이 많았는데, 특히 이재용이 재학 중이던 동양사학과는 특히 운동권으로 매우 유명한 학과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회주의 국가 중국을 공부하려고 오는 학생들도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학과 분위기 자체가 굉장히 급진적인 온동권적 성향이 강했다고 합니다. 그가 대학에 입학한 87년 6월 항쟁 당시 같은 과 1년 선배였던 최영인과 함께 연인인 척 손을 잡고 시위에 참가해서 최루탄 맛을 경험하기도 했고, 전방 입고 거부 투쟁에 동참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학생운동이 활발하던 시대이고, 낯설지 않은 풍경이기도 하지만 재벌가 3세인 이재용이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이 특이하기도 합니다. 과 mt에도 빠지지 않고 참가해서 당시 동기들과 함께 각종 논쟁과 토론도 즐겼다고 합니다.
경영능력에 대한 상반된 평가
이재용의 경영자로서 자질은 2014년 부회장 취임 이전과 이후의 평가가 많이 상반됩니다. 부친인 이건희 회장이 일선에서 활동하던 삼성의 황태자 시절엔 그의 경영 능력에 대한 의구심을 품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오죽하면 당시 이재용을 부르는 별명도 마이너스의 손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그의 경영 능력이 좋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다만 현재의 삼성그룹을 만들었다고 평가받는 이건희 회장도 삼성의 황태자 시절에는 본인이 손댔던 사업에서 큰 실패를 겪어서 부친인 이병철 회장이 도와준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반도체 사업입니다. 이 반도체 사업은 삼성을 글로벌 다국적 기업으로 성장하게 만든 사업입니다.
이건희 전 회장이 갑스럽게 지병으로 인해서 쓰러지게 되고서는 2014년 부터는 이재용이 본격적으로 경영 전면에 나섭니다. 하지만 이재용은 e-삼성의 실패로 인해서 일각에서는 큰 우려를 하였으나 시간이 꽤 지난 현재 상황을 놓고 보면 삼성그룹을 대체로 잘 이끌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재용은 부회장 취임 직후에 삼성테크윈 등 비주력 부분 사업체를 한화 그룹에 매각하였으며, SmartThings / 루프페이 / 비브랩스 / 하만을 인수하는 등 사업 포트폴리오 자체를 변경하였습니다. 하만 인수의 경우에는 총수인 이재용이 인수과정에서 구속당하자 인수가 무산될 뻔했습니다. 간신히 하만 인수 과정은 성사시켰으나, 삼성전자와 하만 사이에서는 갈등이 심각했다고 합니다. 이재용이 석방된 후에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삼성전자와 하만 간 조율을 통해서 사업 부문을 조정해서 분쟁을 해결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측근들 외에도 많은 경영진을 발탁했으며, 실제로 삼성그룹은 이재용이 실질적으로 그룹을 이끌기 시작한 2014년 이후로 전무, 상무급 임원진이 크게 늘었습니다. 임원진급 승진 인사 인선 과정에서 딱히 잡음이 나온 적도 없었었며, 이후 이재용식 인사를 통해서 뽑힌 경영진과 그 경영진들이 뽑은 사원들이 이끄는 삼성그룹은 이건희 시대보다 더 커진 세계적인 대기업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좋은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으며, 매우 우수한 실적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재용의 논란 및 사건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을 잘 모른다는 것에 대해 이재용은 안타까워하거나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자신에게는 보통 사람들과 다른 기준이 적용돼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날 그는 “비자금이나 차명계좌는 모든 기업이 공공연하게 갖고 있는 것인데 왜 삼성에 대해서만 문제 삼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짜증스러워했다.
삼성을 생각한다 p.253
이재용은 아버지인 이건희로부터 삼성그룹 전체의 소유권을 상속세를 거의 내지 않고 넘겨받기 위해서 전환사채 발행이라는 편법을 이용했습니다. 1996년 당시 삼성그룹 전체의 지배구조 맨 위에 있는 기업은 삼성에버랜드였습니다. 에버랜드가 삼성생명을 지배하고, 삼성생명이 삼성전자와 삼성물산을 지배하는 등 출자구조로 인하여 에버랜드 지배하게 될 경우에는 삼성그룹 전체를 소유하게 됩니다. 이렇게 될 경우에는 에버랜드의 주식 가치는 높게 평가되는데, 이를 무시하고 적은 돈으로 인수하기 위해서 전환사채를 저가로 발행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당시 삼성의 변호사였던 김용철 씨의 내부 고발로 인하여 엄청난 사회적인 논란을 일으켰으며, 이 사건으로 인하여 삼성 비자금 특검이 출범하는 등 사회적으로 파장이 상당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무죄로 판결을 내렸습니다.
군대면제에서도 논란이 있었습니다. 이재용과 같은 시대의 재벌 2.3세 대부분이 그럴 듯 병역 면제를 받았습니다. 사유는 허리디스크였습니다. 허리디스크가 있다고 하더라도 운동은 할 수 있지만 면제로 될 만큼 심한 허리디스크가 있다고 하면 못할 것이며, 진단을 받은 병원이 산부인과여서 큰 논란이 있었습니다. 해당 내용 관련해서도 삼성에서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들인 이지호를 영훈국제중학교에 비경제적 사회적 배려대상자 전형으로 입학시키는 과정에서 교육청의 감사겨로 가 성적을 조작한 정황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전형은 경제력과 상관없이 가족 구성 상 배려되어야 할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만든 전형으로서 한부모 가정, 다자녀 가정, 소년소녀 가정, 조손가정, 북한이탈주민 가정, 환경미화원 가정 등이 전형 대상으로 일반전형보다 경쟁률이 현저히 낮을 수밖에 없었으며 선발만 되면 추첨 없이 합격할 수 있기 때문에 부유층들을 위한 편법 전형으로 논란이 많았습니다. 실제로도 부유층의 한부모가정 및 다자녀 가정 출신들이 거의 대부분인 것으로 밝혀져서 결국에는 부유층들을 꼼수를 위한 편법 전형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여론이 악화되자 학교를 자퇴시키고 중국 상하이에 있는 모 외국인 학교로 유학을 보내게 됩니다.
이재용 회장 인생에서 최고로 논란이 컸던 사건은 최순실, 박근혜 게이트 사건에 연루된 것입니다. 청와대 오찬에 참석한 재벌가 총수들이 최순실과 관련된 재단에 출연금을 내었으며, 그 금액은 774억 원이 넘었습니다. 그리고 최순실의 자녀인 정유라에게 갖은 특혜를 부여했다는 논란이 이어지면서 대기업 총수들 역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공범이라는 비판이 쏟아지게 됩니다. 결국 이로 인해서 이재용은 검찰 및 국회 청문회에 참석을 하게 됩니다. 특검에서 수사를 통해서 이재용을 기소하게 되었으며 뇌물혐의에 대한 유죄가 인정되어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법정구석되었습니다. 2021년 1월 25일 이재용이 재상고를 포기하면서 징역 2년 6개월이 최종 확정되게 됩니다. 그리고 22년 8월 15일 8.15 광복 특별 사면대상자로 선정되어서 출소하게 됩니다.
현재 이재용은 갖은 논란을 딛고 삼성그룹을 잘 이끌어 온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물론 그의 대한 평가가 좋지 않은 것도 많습니다. 이전의 논란들이 제대로 해결이 된 것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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