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알고 있으면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한국 근현대사 비극적 사건 시리즈 - 2. 제주 4.3 학살 사건

by yesssi1990 2023. 4. 13.
반응형

제주 4.3 사건은 1947년부터 1954년까지 대한민국 제주도에서 발생한 공산주의자들을 폭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일반 무고한 시민들이 학살당한 사건이자 대한민국의 참혹한 역사입니다. 한국은 일본에서 독립을 하였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소련과 중국이 지원하는 공산주의국가 북한과 미국이 지원하는 민주주의국가 남한으로 한반도는 두 개의 국가로 나뉘게 됩니다. 남한의 정부는 당시 이승만이 이끌고 있었는데, 굉장히 부패하고 권위주의적인 정부였습니다. 그로 인해서 시민들은 정부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핍박을 많이 받은 제주도민들은 더욱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목차>

1. 제주 4.3 사건의 시작

2. 제주 4.3 사건의 전개

3. 제주 4.3 사건의 결과

4. 개인적인 의견

1. 제주 4.3 사건의 시작 

1947년 3월 1일에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삼일절 기념 제주도 대회가 열리게 됩니다. 이로 인해서 25,000-30,000 명의 주민들이 모이게 됩니다. 이날 행사를 끝낸 군중들이 가두시위를 진행했습니다. 시위행렬을 구경하던 어린아이가 경찰관이 타고 있던 말의 발굽에 차였는데, 경찰이 이를 모르고 지나가버린 것입니다. 이에 분노한 군중들이 경찰을 비난하며 몰려들기 시작하였고 기마경찰은 황급이 도망치게 됩니다. 군중들은 도망가는 기마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게 되며, 난장판이 되기 시작해서 경찰서에 있던 경찰들은 군중이 경찰서를 습격하는 줄 알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총을 발포해서 6명이 죽고 8명이 부상을 입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혼란한 틈을 타서 김달삼과 공산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로 인해서 한국군과 서북청년회등이 진압을 하기 시작하였고 공산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무고한 시민들까지 희생당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김달삼과 공산주의자들에게 학살당한 시민들도 많이 발생하게 됩니다. 무고한 민간인을 중심으로 수만 명의 사망자를 낸 것으로 추정되며, 그 과정이 매우 참혹했다고 합니다. 한국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기 중 하나이며, 사건의 상처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주도민 대부분 이 사건으로 인해 가족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2. 제주 4.3 사건의 전개 

발포 사건으로 민심은 급격하게 나빠지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는 남조선로동당에게는 좋은 기회로 다가오게 됩니다. 남조선노동당은 제주도 내의 좌익 세력을 이끌면서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는 운동을 주도하게 됩니다. 대다수의 제주도민들은 호의적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그리고 3.1 발포사건에 대해서 우익 세력들도 우려를 나타내며, 경찰을 향한 비판적 여론이 크게 형성하게 됩니다. 3월 10일부터는 중앙정부에 사과를 요구하는 민관합동파업이 제주도내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관공서는 물론이고 통신기관, 운송업체, 공장, 회사, 학교 등에서 공무원, 심지어는 미군정청 통역단까지 파업에 참여했습니다. 13일까지 제주도 전역으로 퍼지게 됩니다. 파업 찹여자 들은 3.1 발포사건에 대한 사과와 발포자 및 책임자 처벌, 희생자 유가족 지원 등을 요구했습니다. 심지어 제주도 출신의 경찰들도 파업에 참여하여 직장을 이탈하는 일도 벌어지게 됩니다. 당시 제주도민들의 민심이 나빠졌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서북청년회

하지만 당시 남한의 중앙정부인 미군정은 제주도민들의 이러한 요구를 철저하게 무시해버립니다. 미군 보고서에는 총파업의 원인이 3.1 발포사건에 대한 분노와 남조선노동당의 선동에 있다고 봤으며,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파단체 동조자이거나 관련이 있는 좌파분자의 거점이라며 제주도민 모두를 좌파로 몰아갑니다. 그렇게 해서 미군정은 저항세력을 모두 좌파로 몰아가서 총파업을 와해시키려고 했습니다. 미군정이 보낸 서북청년회 사람들 및 경찰들은 당시 경무부장이었던 조병옥의 지휘로 파업 본부를 습격하고 파업 참여자들을 잡아가며, 제주도민들의 총파업을 적극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반응형

탄압으로 인하여 3월 말부터는 총파업이 가라 앉게됩니다. 그러나 미군정의 탄압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육지에서 온 경찰들과 서북청년회외원들을 중심으로 파업 참여자들에 대한 검거가 한동안 이어졌으며, 검거된 사람들은 경찰에 의해서 참혹한 고문을 당하게 됩니다. 1947년 3.1 발포사건 이후부터 1948년 4월 3일까지 2,500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감옥에 갇히고, 모진 고문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들을 수용하기에는 제주도의 감옥은 너무 좁았다고 합니다. 3평 정도의 방에 35명 이상이 갇혀 있었다고 합니다.  감옥에 갇히지 않은 사람들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의 이웃, 가족, 동료, 친구들이 감옥에 갇혀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주농업학교에 수용된 제주도민들

제주도민들의 상황이 더욱 안 좋아지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유해진 제주도지사의 부임이었습니다. 그는 제주도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미군정에서도 인정한 극우파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도민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본인과 정치적으로 반대파만 탄압하고자 했습니다. 유해진 지사는 "일반 대중을 극좌 단체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극우 단체의 힘을 빌렸다"라고 대놓고 발언하면서 반대파 탄압 정책에 매진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탄압 정책은 좌파가 아니라 일반 시민들에게도 행해졌습니다. 이로 인해서 미군정 관계자들조차 불만을 토로했다고 합니다. 당시 군정장관 베로스 중령은 "그(유해진)는 자신의 편과 가까운 단체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단체의 회합도 금지했다. 이와 같은 유 지사의 행보는 본인은 물론 도민들을 당혹케 했다. 제주도 우익테러 행위는 증가했으며, 지사는 이런 행위를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사가 부임한 이래 공직에서 해임되고 있다"며 제주도에 조성된 탄압적 상황을 꼬집었습니다. 제주도를 감찰하던 미군정 관계자들도 유해진 지사가 무모하고 독재적인 방법으로 정치 이념을 통제하려는 헛된 시도를 해왔으며, 경찰은 도민들에게 수없이 테러 활동을 자행했다라며 유해진 지사가 문제 인물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러한 미군정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사태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유 지사의 탄압 정책에 동원되어 제주도에 온 서북청년회원들은 극우테러는 물론, 태극기와 이승만 사진을 강매, 주민들의 재산을 강탈, 폭행, 강간 등 여러 한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렇게 극단적인 탄압이 심해지면서 검차 제주도민과 경찰 사이에서 충돌도 빈번해졌습니다. 1948년에 접어들면서는 경찰의 고문으로 인한 사망자가 속출하게 됩니다. 경찰에 이유 없이 끌려간 20대 젊은이 3명이 잇달아서 사망하게 됩니다. 경찰은 이들이 고문으로 죽은 게 아니라며 극렬하게 부인했지만, 사망한 이들은 모두 고문으로 죽은 것이 확실해 보였습니다. 

 

3. 제주 4.3 사건의 결과

제주도 4.3 사건으로 인한 총 희생자 수는 아직까지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최대 제주도민의 8분의 1이 죽거나 행방불명(추정치는 최소 3만 명에서 최대 8만 명)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일가족 전체가 몰살당하거나 학살 도중 육지로 도피해 살아남았어도 트라우마로 인해 신고조차 하지 못한 경우도 허다했다고 합니다.  현재까지도 유해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서 희생자 수는 아직까지도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유해가 발굴이 되었어도, 신고한 사람 대부분이 70-80대를 넘긴 고령이거나 이미 사망한 경우도 많아서 유해가 발굴되었어도 신원이 파악되지 못한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제주도민 대부분 친척 몇 다리만 건너면 4.3 사건 희생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에도 제주도 촌락(집성촌)에 가면 제사일이 거의 비슷한 날에 치러지는 것을 보면 당시에 제주도민들이 얼마나 많이 학살당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수적으로만 따지면 인구가 적은 도서 지역에 만 단위 이상의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여서 당시 제주도에 인구가 엄청나게 줄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4.3 사건은 4월 3일 전후가 중심으로 된 사건이 아닙니다. 4.3이란 이름이 붙은 이유에는 이 사건의 원인이 무장대의 봉기에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이며, 실제 사건의 시초는 3.1절 발포사건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제주도 4.3 사건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 져야 할 부분인 민간인 학살은 1948년 11월부터 본격적으로 실시된 초토화작전 때문이었습니다.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학교 교수는 제주 평화포럼에서 1949년 제주도민 사망자가 6만 명 발새한 것으로 당시 임관호 제주도지사가 미 정보국에 전달했다는 전문가의 주장을 제기하기도 하였습니다.

 

4.3사건
피신한 제주도민들

 

이 사건으로 인해서 바다를 건너서 부산으로, 일본으로 피난을 떠난 제주도민들이 상당수 있었습니다. 육지로 건너온 피난민의 대부분은 부산 영도 쪽에 정착해서 살게 됩니다. 제주은행 부산지점이 부산의 중심가가 아니라 영도구 남항동에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영도에는 여전히 많은 제주 출신 해녀가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일본으로 밀항한 도민들은 자료로 확인된 것은 281명이지만 실제로는 여러 가지 밀항 루트로 일본으로 피신한 사람들은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참혹한 살육에는 당시 이승만 정부와 미군정의 큰 책임이 있습니다. 남로당 제주도당의 봉기 자체가 이전부터 이어진 당국의 탄압 조치로 부정적인 여론이 조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리고 미군정은 제주도는 냉전 상황에서 군사 요충지 및 임시 거점으로 쓰일, 공산화되면 안 되는 곳이었다고 하더라도 좌파 탄압을 명분으로 제주도민들을 탄압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일제의 협력했던 사람들을 관료들로 사용하고 밀항선을 통해서 제주도 자원을 자신들의 주머니로 빼돌리는 부정도 저질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분노한 주민들의 항의에 경찰이 총을 발포해서 일부 주문들을 죽이자 사태를 수습하겠다며 좌파 탄압이라는 명분으로 사건을 크게 키웠습니다. 결론적으로 당시 기회를 이용한 남로당의 빌미 제공, 그 빌미를 이용해 제주도 인구의 10%를 도륙한 미군정과 우익 단체의 잔혹한행위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4. 제주 4.3 사건의 개인적인 의견

4.3 사건에 대해서 자료를 찾아보고 느낀 것은 명확하게 정부 주도하에 이루어진 학살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국민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정부가 당시 상황이 좋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사태수습은 커녕 잔혹한 학살과 탄압으로 상황을 모면하려고 하는 행동으로 무고한 일반 시민들을 학살했습니다. 당시 가족들 중에 4.3. 사건으로 인하여 피해를 입지 않은 제주도민이 없을 정도라고 했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대한민국 정부는 확실한 피해보상과 사과를 해야 하며, 제대로 사건을 국민들에게 알려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건이 발생한 지 오래되었지만, 사건으로 가족을 잃고 피해를 입은 사람의 상처는 제대로 된 사과나 보상이 없이는 1948년 잔혹했던 사건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같이 읽어보면 좋은 포스팅

2023.02.22 - [알고 있으면 지식이 되는 정보/한국근현대사] - 한국 근현대사 비극적 사건 시리즈 - 1. 국가가 국민을 학살하다. 보도연맹 학살 사건

 

한국 근현대사 비극적 사건 시리즈 - 1. 국가가 국민을 학살하다. 보도연맹 학살 사건

6.25 전쟁이 시작된 1950년 7월 초부터 8월 말에 걸쳐서 경기 수원-강원 횡성 이남 대한민국 전역에서 벌어진 한국전쟁 시기의 민간인 학살 단일사건 중 가장 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비극적인 사건

youneedmee.tistory.com

 

반응형

댓글